영국 내전사 - 양군 출진, 에섹스와 루퍼트

1642년 8월 전쟁이 공식 선포되었을 대 많은 이들은 청교도 목사였던 리쳐드 백스터가 “우리는 단 몇 주 안에 단 한 번의 전투가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고 상상했었다”라고 훗날 회고했듯이, 양편이 각자 하나의 대규모 야전군을 편성해 단 한번의 대규모 회전을 치름으로써 전쟁이 순식간에 끝날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 왕도 의회도 각자 하나의 큰 야전군을 모병하고 편성하는데 집중했지, 거국적인 전략을 짠 것은 없었다. 물론 이는 전초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초기의 단기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후부터는 좀 더 전국적인 규모로 전략이 짜여지고 전투가 치뤄지게 되었다.



의회의 전쟁 지휘와 그 책임은 공식적으로는 하원Commons과 상원Lords 양자가 전통에 따라 공동으로 맡게 되어 있었다. 전쟁 발발 초기에는 각 의회에서 소수의 임원들을 뽑아 안보 위원회Committee of Safety를 구성해 전략을 논의하는 형태였으나 이 때 실질적인 군 전략과 지휘는 남부군의 에섹스 백작과 북부군의 페르디난도 페어팩스 공(그 유명한 페어팩스 장군의 아버지)이 직접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 전초 1년간의 전쟁 수행노력이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자 의회는 1644년 2월에 스코틀랜드 의회와 협의하여 통합된 전쟁 내각War Cabinet을 설립하고 일괄적으로 거국적인 전략을 짜며 지휘관들을 직접 통솔하게 된다. 이는 의회의 통합 정규군인 신모범군New Model Army이 편성되면서 더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갔다.

반면 국왕군의 지휘는 당연하게도 찰스 왕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찰스 왕은 스스로의 군사적 소질에 자신감을 가지고 군대를 통솔하였다. 물론 독단적으로 지휘를 한 것은 아니었고 언제나 전략 전술을 수립할 때는 휘하 지휘관들로 자문위를 구성하게 하여 조언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 자문위는 해당 지휘관들끼리의 질시와 불화로 인한 충돌이 심화됨에 따라 효율성을 상실하였고, 국왕 스스로 자율적인 판단을 해야할 필요가 늘어갔다. 찰스 1세는 옳은 판단을 내리기도 했고 또 때로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는데, 전쟁의 지휘관으로써 찰스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지니고 합리적으로 전략을 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찰스 1세의 가장 큰 실책은 그가 휘하 지방 지휘관들에게 지나친 자율행동을 보장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현장의 판단은 현장 지휘관이 가장 잘 파악할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이는 때로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문제는 그 현장 지휘관들이 무능하거나 지나치게 보신적이거나 또는 이기적이고 반항적이었다는데 있었다. 부동의 지휘관들 때문에 찰스는 여러 번의 전략적인 기회를 놓쳐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의 일이었고, ‘일전을 치를’ 군대의 모집이 가장 우선되는 것이었다. 의회는 행정제도 정비를 통해 병력과 자금을 마련하였고, 왕은 충성심에 대한 호소로 병력을 모았다. 왕의 첫 출발은 우울하고 비관적이었으나 노팅엄을 벗어나 슈르즈버리에 도달했을 때인 9월에는 웨일즈와 북부 지방들로부터 국왕을 위해 싸우겠다는 자원병들이 몰려들어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부족한 자금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친척 리치몬드 공작이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제공하고 뉴캐슬 백작, 글래모건 백작 등의 거부들이 거금을 내놓은 것으로 해결될 수 있었기에 이로써 국왕의 군대는 첫 봉급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찰스 왕에게는 불행하게도 같은 시기에 포츠머스가 의회파의 손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특기할 필요가 있다.

3월의 헐Hull 점거 시도가 실패한 이후로 국왕군은 병기와 탄약의 확보를 위해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 했는데, 헐 다음으로 큰 병기창이 있는 곳은 햄프셔 남단의 항구도시이자 최중요 해군기지였던 포츠머스였다. 포츠머스에 있던 주둔 병력의 지휘과은 죠지 고링George Goring, 1608~1657 이었는데, 그는 8월에 국왕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고링의 휘하에 있는 병력은 단 5백명에 불과했고 고링을 지원하기 위해 국왕이 파견한 허트포드 후작의 천여명의 병력은 포츠머스로 향하는 길에 의회파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포위당한 고링은 몇 번 포화를 주고받는 시도를 했으나 병사들이 탈영하여 버틸 수 없게 되자 9월 7일에 항복하고 포츠머스를 의회에 넘겼다.

이미 해군이 의회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이상 포츠머스의 실함은 예견된 결과였다고 할 수도 있으나 어쨌든 헐도 장악하지 못한데 이어 수천 배럴의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던 포츠머스 병기고의 확보 실패는 국왕군에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얼마나 국왕군에 악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국왕군이 계속해서 고질적인 군수품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링은 이후 네덜란드로 가 국왕군에서 싸울 용병들을 모집하고 그해 겨울에 귀환하여 지휘관으로써 악명을 쌓게 된다.-

한편 의회측의 군 모집은 비록 더디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수도권에 새로이 큰 규모의 야전군이 편성되었고 이의 지휘는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브로Earl of Essex, Robert Devereux가 맡게 되었다. 에섹스 백작은 과거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았던 (그러나 이후 신임을 잃고 처형당했던) 아일랜드 총독 에섹스 백작의 아들이었다. 그는 근엄하고 과묵하며 근면 정직한 51세의 작고 단단한 남자였으나 그의 사생활은 악명이 높았다. 그의 첫 결혼은 그가 대륙에서 종군하고 있던 동안 벌어진 아내 프란시스 하워드의 유명할 정도의 불륜 생활 때문에 파탄이 나 상류사회의 웃음거리가 된 바 있었다. 두 번째 결혼도 두 번째 아내도 불륜을 저지르면서 파국을 맞았고, 이후 홀로 그 매형의 집을 빌려 살게 됨으로써 그다지 이상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군사적으로는 가장 의회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가장 뛰어나거나 참신한 지휘관은 아니었으나 의회가 신뢰하는 고관들 중에는 그나마 전쟁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30년 전쟁의 참전자로 1620년부터 1625년까지 독일에서 신교군 장교로 복무하며 많은 대규모 교전에 참전했던 경력이 있었고 대륙식 전쟁수행을 배운 사람이었다. 또한 인격적으로는 부하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였기 때문에 즉각 최중요 야전군의 사령관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의회파로 남은 대귀족 중 가장 명망높은 가문 출신이었기에 ‘평민 반란’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희석시킨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성 고려도 그의 사령관 임명에 일조하긴 했다.

[Robert Devereux, 3rd Earl of Essex. 1591~1646]


그의 성격은 그가 막 사령관직에 임명되었을 때의 일을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사령관이 되어 출정 준비를 하러 떠나는 에섹스 백작은 하원에는 들리지도 않고 상원에 가 짧은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이에 뭔가 승리를 다짐하는 확언이라도 듣기 위해 그를 찾아 따라간 하원의원들은 그가 어느 관공서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파이프 담배만 뻑뻑 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이 다가가 뭔가 말을 걸려 했으나 에섹스는 그 의원들에게 그저 아무 말 없이 모자를 벗어 끄덕 목례만 하고 일어서 자리를 떠 그대로 출병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과묵한 에섹스가 지휘하게 된 그 군대는 짧게는 고작 몇 주의 군사훈련밖에 받지 못한 신병들이 대거 포함된 오합지졸이라 할 수 있었고 그 군대가 1642년 9월 9일 런던에서 출병하며 거리를 행군했을 때 관찰자들은 병사들이 열과 오를 제대로 맞추지도 않았으며 발을 맞춰 열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쉽게 보고 기록에 남길 수 있었다. 백작 스스로도 ‘이 군대의 불손함과 무능함은 국왕군(Cavaliers)과 필적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라고 발언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 지휘관들 중 상당수는 대륙의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다. 기병 사령관 윌리엄 발푸르는 스코틀랜드 출신 용병이었고 그 외 스코틀랜드 용병들도 다수 장교로 종군하고 있었다. 포병 쪽의 군사고문으로는 프랑스인이, 기병 전술 교관으로는 크로아티아인과 네덜란드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네덜란드 사람 한드 베어Hans Behre는 아예 네덜란드인들로 구성된 용병들 1개 기병 연대를 모집하여 끌고 왔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물론 군사경험은 전무해도 신분과 재력이 있던 하원의원들도 다수 지휘관으로 나섰다.


한편 이에 대항하는 국왕군도 그 구성과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총사령관 찰스 1세의 영도 아래의 그 군대는 갓 모집된 신병 오합지졸들로 구성되었으나 외국인 장교들도 의회군과 비등한 비율로 참가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지휘관들이 대륙에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 명망이 높았던 것은 보병대의 총 책임자로 발탁된 제이콥 애슬리Jacob Astley 경과 용기병대의 지휘를 맡은 카톨릭 교도 아서 애스튼Arthur Aston 경, 갓 포스의 백작으로 서임된 스코틀랜드 용병 패트릭 루스벤Patrick Ruthven 등으로, 대부분 고령에다 생애가 전투 경험으로 점철된 노익장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휘관들 중 전쟁을 통틀어 가장 이름을 날리게 되는 인물은 노익장들이 아니라 당시 새파란 젊은이였던 라인란트의 루퍼트 공Prince Rupert이었다,

[Prince Rupert of the Rhine, 1619~1682]


프린스 루퍼트. 그가 태어난 독일 땅에서의 이름대로는 프린쯔 루프레히트 팔쯔그라프 바이 라인 헤르조그 폰 바이에른Ruprecht Pfalzgraf bei Rhein, Herzog von Bayern. 찰스 1세의 누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라인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프리드리히 일가는 30년 전쟁의 정치 게임의 결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팔츠 지역이 바이에른에 합병되면서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으나 루퍼트는 그 과정에서 많은 세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열 살 때부터 군 제식훈련과 전법을 라이덴 대학에서 익히고, 14세에 종군을 시작하였으며 18세에는 이미 개신교 제후국 측 기병 연대의 연대장으로써 전장을 내달렸던 루퍼트는 어린 나이에 단순히 뛰어난 기수일 뿐 아니라 기병 전술과 부대 운용을 깊게 이해하고 있던 젊은이였다.

많은 이들에게 루퍼트는 무모하고 오만방자하며 무례하고 혈기만 넘치는 젊은이로 인식되기 마련이었다. 그는 언제나 화려한 장식과 원색적이고도 값비싼 의상으로 스스로를 치장했으며 이는 그의 휘하 부대에도 퍼지는 풍조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신분과 궁정생활에 대한 자기혐오로 인해 일부러 부둣가 선원들의 생활태도와 언어를 익힌 덕에 언제나 거칠게 말하고 다녔고 사람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호오가 지나치게 분명했다. 그는 당대 모두가 인정하는 미남이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불신감도 키웠다. 그는 시니컬한 태도로 블랙 조크를 구사하는데 능했으며 호전광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혈기왕성했다.

하지만 루퍼트에 대한 그런 평가들은 지나치게 단면적인 것이었다. 그 휘하 병사들은 그를 죽도록 따랐으며 그는 단순히 영광을 좆는 무모한 젊은이가 아닌 식견이 있는 전략 전술가였다. 그의 기병 운용 전술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돌격전법을 따랐으며 전략적 재량권이 주어졌을 때는 합리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기동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여줬다. 또한 후대의 공통적인 평가에 따르면 그는 전황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전훈으로부터 배워 전술을 수정함에도 주저가 없었다. 성급하다는 평가와는 달리 필요할 때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작전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 훗날 그는 단순한 기병 사령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전술가이자 해군 제독으로도 군력을 이어 나가며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지금, 삼촌을 따라 영국의 내전에 참가하기로 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 셋에 불과했다.

국왕으로 하여금 노팅엄을 떠나 슈르즈버리로 향하도록 조언한 것도 루퍼트였다. 찰스 1세는 조카를 신뢰하였으며 그의 조언을 따랐고, 그 덕에 군세는 좀 더 나은 위치에서 병력을 증원받고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의회군도 기동하기 시작했다. 9월 13일, 대규모 군 집단이 편성되자 에섹스 백작은 병력을 이끌고 노팅엄 방면으로 출진했다. 그동안 국왕은 주둔지를 여러 차례 옮겼고 처음에는 국왕군이 체스터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따라가려던 에섹스의 부대는 몇 번 갈팡질팡하다 노섬튼으로, 노섬튼에서 다시 워스터로 향했다. 바로 이 때 즈음에 옥스퍼드 대학은 왕에게 군자금으로 기부할 귀금속과 물자를 보냈고, 이 귀금속은 워스터에 위치한 국왕의 조폐소에서 녹여져 주조되기 위해 운송되게 되었다. 이 중요한 수송대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 바로 프린스 루퍼트와 그가 이끄는 천여명의 기병대였다. 그리고 이 기병대가 영국 내전 최초의 단위 부대간 야전을 치르게 되었다.



1642년 9월 23일 루퍼트의 기병대가 에섹스 백작의 본대에서 떨어져나와 기동하던 전위 기병대 천여명을 워스터 남쪽 2마일 지점 소읍 포윅과 그 옆에 흐르던 템 강 근처에서 맞닥뜨린 것은 수전히 우연의 소산이었다. 포윅의 다리를 건너고 있던 의회군 기병대를 먼저 발견한 것은 루퍼트의 정찰병들이었고 보고를 들은 루퍼트는 병력을 물리지 않고 즉각 교전하기를 원했다. 루퍼트는 의회군 기병대가 대응태세를 갖추기 전에 먼저 돌격하려고 서둘렀고, 루퍼트의 기병대는 심지어 무구와 군장도 제대로 착용하지 못한 채 말 위에 올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퍼트 본인이 최선두에서 기병도를 번뜩이며 돌격을 이끌었고 기선을 제압당한 의회군은 백 수십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루퍼트의 기병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포윅교 전투Battle of Powick Bridge는 천 명 단위의 소부대끼리 벌인 작은 교전이었고 사상자 수도 그렇게 크진 않았다. 하지만 국왕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된 승리였고, 루퍼트가 이름을 알린 전투이자 영국 내전 최초의 ‘전투’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의회 측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승리했다는 거짓 선전을 했으나 에섹스 백작은 ‘우리 기병대는 앞으로 열병의 방식과 엄정한 군기를 익혀 사려깊게 전진하고 질서있게 후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국 내전의 첫 본격적인 전투는 그 한 달 후 어느 능선에서 치러지게 될 터였다.




*이전 내용이 기억 안날 경우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오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덧글

  • 모에시아 총독 2012/05/25 08:49 #

    대작에 첫코로군요!

    그나저나 저는 여태까지 루퍼트공이 기병돌격에만 탁월한 지회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12/05/27 14:37 #

    내용은 계속 흥미진진하지요.
  • TBSH 2012/05/25 10:31 # 삭제

    괴링은 독일에도 영국에도 도움이 안되는군요
  • Ha-1 2012/05/26 22:47 #

    +1!!
  • 월광토끼 2012/05/27 14:37 #

    ㅎㅎㅎㅎㅎ
  • 로자노프 2012/05/25 11:04 #

    확실히 양쪽 모두 30년 전쟁 참가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군요. 근데 에섹스 백작은 웬지 독일에 있을 때 틸리에게 쫓겨다니기 바빴을 듯요...
  • 월광토끼 2012/05/27 14:39 #

    틸리가 아니라 곤살로 코르도바에게 왕창 깨진 전투에 참가했던 모양입디다만은
  • 유리멘탈 2012/05/25 13:14 #

    이렇게 시리즈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처음 등장....
    포윅 다리는 소위 말하는 기병정신의 모범적인 사례네요.
  • 월광토끼 2012/05/27 14:43 #

    물론 그 모범성도 언제나 효과 있는건 아니긴 합니다만..
  • 누군가의친구 2012/05/26 02:34 #

    “우리는 단 몇 주 안에 단 한 번의 전투가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 마치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려 공세를 했던 맥아더가 생각나는군요. 뭐 결과는 중공군의 제2차 공세및 1.4후퇴로 결말 나지만 말입니다.

  • 위장효과 2012/05/26 07:40 #

    비슷한 예로, 서부전선으로 출병하는 병사들에게 "낙엽지는 가을이면 틀림없이 귀향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연설한 카이저도 있지요.
  • 월광토끼 2012/05/27 14:44 #

    마찬가지 사례로는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전쟁 끝낸다'고 호언장담하던 마켓가든 작전도 있겠습니다.
  • 행인1 2012/05/26 09:31 #

    그시절 교통/통신 사정을 생각하면 찰스1세가 일선 지휘관들에게 재량권을 부여한게 맞는데 정작 지휘관 인선이 잘못되었군요.(역시나 인사가 만사?)
  • 월광토끼 2012/05/27 14:47 #

    그런데 그 지휘관들도 누가 되어도 사실 재량으로 뭘 어떻게 잘 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긴 합니다. 주어진 병력이나 물자, 지역 상황들을 생각하면 말이지요
  • 셔먼 2012/05/26 10:41 #

    포츠머스 확보 실패로 인한 탄약 부족과 지방관들에 대한 지나친 군권 위임이 국왕군의 패전 요소가 되었군요.
  • 월광토끼 2012/05/27 14:47 #

    여러가지 요소들 중 하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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