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엣지힐 전투



엣지힐Edgehill은 옥스퍼드셔와 워릭셔 사이 분계선에 위치한, 해발 수백 피트 가량의 언덕이 3마일 정도 길이로 펼쳐진 능선이다. 나무 몇그루를 제외하곤 잔디에만 뒤덥혀 있던 그 언덕은 아무런 중요성도 유명성도 없었지만 1642년 10월 23일 그곳에서 벌어진 일 덕분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9월 23일의 포윅 교 전투가 있고 보름 후, 계속 슈르즈버리에 머무르고 있던 찰스 1세는 작전회의를 열어 계획을 논의했다. 에섹스의 의회군은 ‘국왕을 공격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해서 수동적으로 느리게 반응할 뿐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기에 국왕군에게는 선제행동의 기회가 있었다. 몇가지 사안이 고려되었고 그중에는 워스터 공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윅교 전투에서 루퍼트 공의 기병대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를 보조할 보병이 없었기에 그들은 워스터에서 소개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의회군 본대가 워스터에 진주하여 주둔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스터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을 에섹스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보다, 런던을 향해 진군하며 동시에 워스터에서 에섹스를 끌어내도록 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양군의 이동 경로]



그렇게 해서 10월 12일 국왕군은 슈르즈버리로부터 출진해 런던을 향해 세번Severn 강을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 국왕군 병력은 기병 8천과 보병 1만 5천이라는 규모에 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숫자가 모두 제대로 된 군대를 구성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10월 초에 국왕군과 합류한 일군의 웨일즈인들은 수는 많았지만 가진 무기가 고작 갈퀴와 낫 밖에 없었고 국왕군에는 그런 농부들을 무장시킬 여분의 무기도 없었다. 무기는 물론이고 화약도 부족했으며 보유하고 있는 야포도 20여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승리를 확신했으며 그 빈약한 무장의 군대도 루퍼트가 포윅에서 거둔 승리 덕에 사기만큼은 드높았다.

한편 에섹스 백작의 군대는 국왕군의 움직임을 전해 듣고 10월 19일에 워스터에서 출진해 워릭으로, 다시 런던으로 느리게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 때, 아직 전쟁에 미숙한 양측은 기병대를 전위 정찰대로 활용하는 대신 보병 바로 옆에서 행군하게 하는 중이었기에 이들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이동만 하였다. 그랬기에 10월 22일 토요일 오후에 노섬튼 서쪽에 위치한 소읍 엣지코트에 도달한 루퍼트의 병사들이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의회군 병사들을 포로로 잡은 것은 우연의 소산이었다. 루퍼트는 포로들을 심문하고는 즉각 정찰대를 내보내 전장을 파악했으며 에섹스의 본대가 엣지코트 서남쪽의 카인튼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휘하의 기병대에게 지시해 카인튼 북쪽의 고지 - 엣지힐 - 를 점령해 놓도록 함과 동시에 찰스 1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The King's War Council, October 22nd, 1642]


찰스 1세는 이에 작전회의를 여는데 여기서 이후 국왕군 측의 고질적인 문제가 될 지휘관 간의 불화가 크게 터져 나왔다. 이는 젊은 루퍼트 공에 대해 다른 지휘관들이 가지고 있던 불만 때문으로, 이 불화는 국왕군 결성 때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었다. 국왕군에는 루퍼트보다 두세배는 더 나이도 많고 경험, 연륜과 전공도 많은 상급 지휘관들이 여럿 있었으나 국왕은 루퍼트 공을 국왕군 전 기병대의 부사령관Lieutenant-General of the Horses으로 임명하여 조카에 대한 신뢰를 어필하였기에 잡음이 일었던 것을 시작으로,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와 외국인이라는 신분(독일의 라인팔쯔)이 그와 다른 지휘관들의 사이 악화에 기여했다. 왕비 앙리에타는 남편에게 ‘루퍼트를 믿지 말고 그에게 중임을 맡기지 말라’고 조언했으며 왕비와 친분이 있던 국왕의 행정관료들은 모두 루퍼트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막 국무대신으로 임명된 포클랜드 자작도, 국왕의 주요 야전 사령관이 되는 딕비 백작, 그리고 보병 사령관 린지 백작 등이 루퍼트와 갈등을 겪었다. 가장 큰 문제는 국왕이 내린 조서 덕분에 루퍼트는 오로지 국왕의 명령만 받으면 되는 독립적인 지휘권을 얻었고 다른 고급 지휘관들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엣지힐 전투 전야의 작전 회의에서 있었던 갈등은 루퍼트가 기병부대의 전술 배치 뿐 아니라 보병의 배치와 운용에까지 간섭하면서 빚어졌다. 보병 부대의 지휘권자가 누구임을 명확히 하자고 나선 린지 백작Earl of Lindsey은 국왕이 조카의 말이 맞는다는 것 같다며 편을 들어주자 화가 폭발하여 자신의 지휘봉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장군으로써 지휘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일개 연대의 지휘관으로써 선봉에라도 서겠다!’ 고 외친 후 자리를 떠 버렸다. 1582년 생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와 나싸우의 마우리쯔 대공 휘하에서 군대를 지휘했고 버킹엄 공작 휘하에서는 라 로셸 전투의 부사령관직까지 수행했던 노장은 1619년생의 ‘무례한 애송이’가 자신의 지휘권에 참견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국왕은 할 수 없이 늙은 포스 백작 패트릭 루스벤을 대신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패트릭 루스벤은 1606년부터 스웨덴 군에 자원해 수십년을 동 군대에서 활약, 바로 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깊은 신임과 찬사를 얻어 스웨덴의 장군Lieutenant-General의 직위, 스웨덴 귀족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국왕의 선임 군사고문으로 많은 활약을 하게 된다.

이후 몇 번의 설전이 오갔고, 루퍼트는 의회군이 진용을 정비하기 전에 당장 야습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실제 부대 배치와 작전은 결국 루퍼트 대공이 제안했던 그대로 이뤄졌다. 중앙에 보병대 - 3개 여단이 일진을 구성하고 이진에 2개 여단을 구성하며 각 여단은 중앙에 파이크병, 양익에 머스킷병의 편제 -가 집중 배치되고 전군의 양익에 기병대가, 그 기병대의 옆으로 전선 끝에 용기병대가 배치되는 전형적 스웨덴 식 배치 전열이었다. 뤄트 본인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우익에 배치되었고 좌익은 루퍼트의 부지휘관이자 지휘권 경쟁자였던 헨리 윌못이 맡았다. 국왕의 친정기親征旗-King's Royal Standard를 든 에드먼드 버니 경이 중앙 선두에 섰다.

이렇게 배치되는 국왕군을 의회군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정찰병을 따로 내보내지도 않았고 적이 근교에 와 있다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에섹스 백작은 일요일 아침 10월 23일에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려던 중이었던 오전 8시 경에서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시작한다. 이 때는 이미 국왕군이 능선을 따라 잘 배치되어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의회군도 국왕군과 비슷한 형태로 전열을 짜, 보병대가 중앙에, 기병대가 양익에, 용기병대가 양쪽 가장 끝 쪽에 배치되는 기본 방식은 동일했다.

이 때 에섹스 휘하 의회군 내에는 훗날 전쟁영웅으로 명성을 날리게 될, 그러나 아직은 무명의 용사들인 사람들이 하급장교로 대거 포진해 있었다.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 에드워드 월리Edward Whalley, 존 오키John Okey, 그리고 급진 과격 사상가이자 만민평등권을 주장하게 될 존 릴번John Lilburne 등이 그들이었다. 의회군의 기병 우익을 지휘하고 있던 건 바실 필딩Basil Fielding으로, 그의 아버지 덴비 백작 윌리엄 필딩William Fielding, Earl of Denbigh은 반대편의 국왕군의 루퍼트 휘하 기병대에서 일반 병사로 종군하고 있어 가족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바실 필딩은 그 다음해에 덴비 백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아버지 윌리엄 필딩이 버밍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양군은 모두 알록달록 형형색색 화려한 색상의 군복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군복은 각 연대의 연대장이 마련하는 것이었기에 연대별로 각각 다른 모습이었다. 지휘관들은 보통 깃털과 레이스, 망토 등으로 더 화려하게 치장하기 마련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들은 ‘군인스럽지 않다’고 여긴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이는 국왕군이나 의회군이나 마찬가지로 만연한 기조였다. 그러나 이들은 복장만 화려했을 뿐 베테랑 장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직 전쟁을 하는 법을 몰랐다.


이 날 엣지힐에 집결한 찰스 1세와 루퍼트 대공이 지휘하는 1만 2천의 국왕군은 3천의 기병과 9천의 보병으로 이뤄져있었고, 에섹스 백작이 지휘하는 1만 5천의 의회군은 3천 기병과 보병 1만 2천으로 양군의 세는 비등했다.

양군이 대치하면서 서로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 검은 갑옷 위에 검은 벨벳 코트 복장을 한 국왕 찰스 1세가 전군 앞에 나서 전열을 따라 말을 달렸고 국왕군은 만세 삼창을 외쳤다. 에섹스는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나 오후 1시경부터 야포들로 하여금 포격을 개시했다. 찰스 1세의 포들도 대항해 불을 뿜어 약 한 시간 동안 포격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양군 포병대 모두 미숙하여 제대로 효력을 보지 못했고, 오후 세시가 가까이 되어 하마한 국왕군 용기병들이 움직이고 여기에 이어 우익의 루퍼트의 기병대가 움직이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국왕군 기병대가 의회군 전열에 육박하는 동안 미숙한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총을 쏘았는데, 유효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총을 쏨으로써 효과적인 사격 기회를 날려버렸으며 반면 돌격 바로 직전까지 피스톨을 쏘지 말 것을 명령받은 루퍼트의 기병대는 제임스 램지 경이 이끌고 있던 의회군 기병대를 제대로 들이 받았다. 곧 패닉에 빠진 의회군 좌익 기병대가 패주하기 시작했다. 예비대를 지휘하던 존 바이런 경의 직속부대가 도망치는 이들에게 머스킷을 쏴 댔으나 패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좀 더 정연하게 훈련된 기병대였다면 여기서 패주하는 적 기병은 내버려두고 재정렬 후 적 보병대의 전열을 쳤어야 했겠지만, 신이 난 루퍼트의 기병대는 루퍼트 본인의 정지 외침을 무시하고 사방으로 내달려 의회군의 후방에 있던 야영지와 수송대를 향해 떠나 버렸다. 그들은 거기서 약탈에 정신이 팔렸으며, 루퍼트가 일부를 간신히 규합해 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전투가 완연한 혼전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헨리 윌못이 지휘하던 국왕군의 나머지 기병대도 돌격을 감행하여 의회군 기병대를 패주시켰으나 이들도 제 시간 내에 재정렬하는데 실패하고 도망가는 적 기병을 쫒는데 급급했다. 이로써 국왕군 보병대의 측면이 노출되었고,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의회군 기병 예비 부대가 이 기회를 활용해 국왕군 보병대의 측면과 후방의 보병대에 돌격을 가해 혼란을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의회군 전 보병대가 전진하여 국왕군 보병대와 맞부딪혔다. 파이크병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파이크를 쑤셨고 서로가 더욱 밀집하면서 혼란 속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왕의 기수 에드먼드 버니 경이 전사하고 왕기가 의회군에게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국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의회에 찬동했으며 그 아들은 의회의 일원으로 ‘반란’에 참가하고 있었으나 왕에 대한 우정과 충심으로 종군하러 나섰던 늙은 에드먼드 버니 경은 죽는 순간까지 깃발을 꼭 붙잡고 있었기에 나중에 깃발은 그의 잘린 손이 그대로 붙어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에드먼드 버니 경 본인의 시신은 혼전 이후 끝까지 확인되지 못했다. 주변의 회고에 따르면 버니 경은 갑옷과 서코트의 착용도 거부한 채 전투에 나섰다고 한다.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왕기를 지키던 Sir Edmund Verney, 1590~1642]


버니 경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에드워드 시든햄 경은 그가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왕기를 든 채 서너명의 적군을 베어 넘기던 중 그 시종과 함께 파이크 숲에 찔려 사라졌고 그 후 다시 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시든햄 경의 편지를 받은 버니 경의 아들이자 의회측 하원의원 랄프 버니는 부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했다. ‘내 펜은 내 비참함을 채 표현할 수 없소. 신이시여, 이 끔찍한 상황에 제게 힘을 주소서.’ 이런 비극은 버니 경만 겪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빼앗긴 왕기는 카톨릭 교도이던 존 스미스 대위가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의회군 전열에 뛰어들어 스스로 여러차례의 검상과 창상을 입어가며 다시 되찾아 오는데 성공했다. 전투 다음날 그는 국왕으로부터 용전분투에 대한 보답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그 바로 다음에 치러진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의회군의 지휘관 존 바이런 경도, 국왕군의 지휘관 제이콥 애슬리 경도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국왕 근위 기병대의 고급 장교들도 상당수 전사했다. 국왕 직속의 근위병들도 총을 맞고 쓰러질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으며 어린 왕세자Prince of Wales 찰스도 직접 피스톨을 뽑아들고 전투에 참가할 뻔 했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제임스 왕자는 ‘일군의 의회군 기병대가 자신과 형의 일행을 향해 접근하다가 국왕 직속 근위병들을 알아보자 물러났다’ 며, 만약 그들이 그대로 쳐들어왔다면 자신과 왕세자는 틀림없이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만약 이 때 왕자들이 의회군에 인질로 잡혔다면 전쟁은 대단히 다른 전개 양상을 띄었을 것이다.



[Robert Bertie, Earl of Lindsey, 1853~1642]



한편, 보병 총지휘관직을 맡고 있다가 루퍼트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 직위를 버리고 자신의 직속 연대의 선두에 서겠다던 린지 백작 로버트 버티는 정말로 최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격한 백병전 속에서 린지 백작은 허벅지에 총탄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져 포로로 붙잡혔다. 그의 아들이자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던 몬타규 버티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스스로 창을 꼬나잡고 뛰어들었다가 스스로도 포로가 되었다. 린지 백작의 오랜 친구였던 에섹스 백작이 의사를 보냈으나 의사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몬타규 버티는 아버지 린지 백작이 그날 밤 출혈과다로 사망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술도 대형도 제대로 없게 섞여버린 혼전 속에서 양군 모두 지쳐갔다. 석양이 붉어질 때 쯤 되자 그제서야 루퍼트 공의 기병대가 전장에 다시 나타났고, 이를 본 의회군 보병대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집중된 기병 돌격이 가해졌다면 의회군이 패주할 법도 하였으나 기병대의 부사령관이던 헨리 윌못이 이에 반대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소. 살아서 그 승리의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다만 모두가 윌못의 생각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아니, 엣지힐 전투에 명확한 승자는 없었다.

‘승리’를 했다고 생각하여 들 뜬 이들은 없었고 많은 병사들은 첫 전투의 충격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전투 후의 참상은 더욱 우울하여, 추운 10월 밤 숙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참전자들은 서리를 맞으며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전장에 내버려진 부상자들은 그대로 부상의 악화로 죽거나 얼어 죽었다. 그동안 한 몫 잡아보려는 약탈자들이 부상자들과 시체들로부터 갑주와 옷, 그외 재물을 뜯어냈다.


이 와중에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약탈자들의 몰인정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기록을 남긴 에드워드 하이드 경의 일기에 따르면, 국왕군의 저베이스 스크로프 경Sir Gervase Scrope과 벨링엄 경Sir Bellingham(?)은 심한 부상을 입고 발가벗겨진 채로 전장에 남겨졌으나 둘 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발견되어 이송되어 치료받았고 완치될 수 있었다. 의사들은 그들의 의술로는 아마 그들을 살릴 수 없었을 것이나, 벗겨진 상태로 추운 밤을 맞아 체온이 저하된 덕택에 혈압도 낮아져 저절로 지혈이 된 덕택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영국 내전 최초의 대규모 회전會戰이 된 1642년 10월 23일 엣지힐 전투에서 국왕군과 의회군은 모두 각각 500~60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각각 1500~160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양측이 각각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이 결과를 두고 양측 모두 대승을 선전해대었으나 명확한 것은 이 전투가 무승부로 끝났다는 것이었다.



[엣지힐]



연재 전체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연재한지 한참 되었고 벌써 여러 글들을 올렸지만 첫 회전은 이제서야 치뤄졌습니다 허허헛

덧글

  • 놀자판대장 2012/05/27 13:34 #

    저번에 루퍼트 공에 대해 쓰신 글의 영향일까, 루퍼트 공의 기병대라면 엄청난 실력을 지닌 군대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콩가루였나 봐요? 다른 지휘관들과의 불화는 논외로 하더라도...
  • 월광토끼 2012/05/31 15:41 #

    의외로 저정도도 정예기병에 속합니다. 전쟁 초반 동안에는 계속 의회군 기병에 비해 우위를 점했죠.

    하지만 크롬웰 영도하 신형군 철기병대는 파괴력은 약할지 몰라도 지휘관 명령에 복종하는게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덕을 볼 수 있었죠
  • shift 2012/05/27 14:13 #

    ㅋㅋㅋㅋ 오합지졸들 쌈같아요;;;; 마치 몇몇 장수들의 능력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 월광토끼 2012/05/31 15:42 #

    실제로도 오합지졸들이였으니까요 ㅎㅎ
    총 한 번 쏴보기는 커녕 총이란 물건을 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이틀 동안 총 쏘는 법 교육받고 전장에 선 농군들도 상당수였으니 말입죠
  • 유리멘탈 2012/05/27 15:10 #

    루퍼트라는 '캐릭터'에 국왕의 신뢰 덕분에 국왕군 내부의 불화가 일어났다는게 흥미롭습니다.
  • 월광토끼 2012/05/31 15:42 #

    그리고 그 불화는 앞으로 내내 국왕군 내의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 dunkbear 2012/05/27 15:23 #

    오도방정, 뒤죽박죽의 전투였군요. ㅎㄷㄷㄷ;;;
  • 월광토끼 2012/05/31 15:42 #

    그야말로 혼전난전이었지요
  • 검투사 2012/05/27 15:47 #

    전투를 "엣지 있게"(혜수 누님풍으로~) 했다는 줄 알고...(어?)
  • 월광토끼 2012/05/31 15:42 #

    ㅎㅎㅎㅎ
  • 행인1 2012/05/27 22:59 #

    아마추어들이 전쟁이다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다로없군요. 보병은 사격통제가 안되고 기병도 무질서하고...;;;
  • 월광토끼 2012/05/31 15:44 #

    그나마 저런 아마츄어들이 서로를 그렇게 참혹하게 죽이고 죽는 근접 백병전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죠
    당장 등 돌리고 도망쳐서 전열 붕괴하는게 아니라..
  • 자이드 2012/05/28 02:08 #

    야한 계곡 전투(어엉?)
  • 월광토끼 2012/05/31 15:45 #

    ....그런걸로 치면 뭐 한국 전쟁에서도 흔히 있었을 것 같은데

    H 고지를 점령하라...?
  • 터미베어 2012/05/28 04:16 #

    전체적으로 훈련도가 낮았었군요...
    급하게 끌어모은 군대라서 그런가..
    그나저나 웨일즈 인들도 보병으로서 전열에 참전했었나요? 양측의 무장 상태도 궁금하네요...
  • 월광토끼 2012/05/31 15:47 #

    각 연대마다 무장 상태가 다르지요.
    연대장 (오늘날의 연대장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비를 들여서 연대를 만들어낸 연대 창설자)들의 호주머니 상황이 넉넉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렸으니까 말입니다.

    맨몸에 피혁 보호구 두르고 창 꼬나잡는 수준에서 투구에 흉갑에 신가드에 숏쇼드까지 다 장비하고 있는 창병 부대까지 다양했습니다.
  • 터미베어 2012/05/31 15:57 #

    아 맞다...
    당시는 의용연대랄까....연대장이 모집하고 훈련시키고 장비입혔었죠 참....
    런던랍스타부터 헐벝은이들까지 다 있는 위엄찬 내전..ㄱ-
  • 냉동만두 2012/05/28 15:43 # 삭제

    감사히 읽었습니다.
    총을 무장으로 하는 기병이 있는데 파이크병 전열이라니 쉽게 그려지진 않네요.

    그나저나 참 애들 막쌈도 아니고;;
  • 월광토끼 2012/05/31 15:49 #

    30년 전쟁에서도 흔히 보는 장면이지요. 피스톨 든 기병대의 운용 전법은 아주 다양했는데, 돌격을 하지 않고 빙빙 돌면서 총을 쏘는 전법도 있고 근접해서 피스톨 일제 사격 후 기병도 들고 뛰어드는 전법도 있고...

    보통 파이크병은 대기병용으로 등장한 병종임에도 불구하고 이시대에는 파이크병 전열 vs 파이크병 전열이 맞부딫는 전투를 했습니다.
  • sceptre 2012/05/28 22:58 #

    사족이긴 한데, Worcester면 우스터(wooster)라고 읽지 않나요? 뉴잉글랜드 사투리이긴 한데...
    영국식 발음은 모르겠습니다만. 우스터 소스도 그렇고요.
  • 월광토끼 2012/05/31 15:50 #

    제 귀에는 우스터와 워스터 사이 발음으로 들리기는 하는데 우스터도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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