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과정과 외교의 문제 - 下

上편에 이어서.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에피담노스라는 지역을 거론하면서 그 역사와 상세한 위치를 길게 설명해준다. 그리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에서 그렇게 상세하게 따로 설명을 해야했던 것은 그만큼 에피담노스가 그의 독자들에게 있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별 상관도 없었던 먼 오지였기 때문이다. 이는 지도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게 가는 바다.



그리스는 커녕 북쪽 저 멀리 아드리아해 옆 일리리아 지방에 붙어있는 에피담노스Epidamnos는 오늘날의 알바니아 북부의 항구도시 두러스로, (로마시대에는 디라키움) 기원전 7세기 (600년대) 경에 건설된 작은 식민 항구도시였다. 이를 세운 것은 펠로폰네소스의 코린토스계 정착민들과 코르키라 섬 출신 정착민들이었다. 코르키라도 본래는 코린토스계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였다. 이처럼 코린토스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에게해나 시칠리아나 이탈리아에까지 곳곳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할 만큼 펠로폰네소스 국가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해양진출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그 코린토스가 건설한 곳 중에서 본국과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면서 적대관계를 쌓게 된 것이 바로 코르키라였다.

코르키라, 오늘날에는 코르푸라 불리우는 이 섬나라는 과두정 국가였던 모국 코린토스와는 달리 민주정 체제였으며 또한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다. 코르키라는 보통 식민도시가 창건국에 보이는 예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코린토스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전쟁에 휘말릴 때에도 무관심하게 행동했다. 코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사이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이 뿐 아니라 코르키라는 국제적인 축제행사나 운동경기에서 코린토스인들에게 공공연한 모욕을 주거나 예우를 거부하는 등의 태도를 보여왔고, 이에 코린토스가 받은 모욕감과 그로 인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에 양국은 여러 부분에서 호전적으로 경쟁했으며 코르키라인들과 코린토스인들이 공동으로 건설했던 식민지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그 지배권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에피담노스도 예외는 아니었고 코린토스와 코르키라는 에피담노스의 창건국이 누구냐에 대한 문제를 놓고 종종 분쟁을 일으켜왔다.




그러던 차인 기원전 436년 에피담노스에서 내전이 발발한다. 민주정차와 과두정파의 충돌이 격화되며 생긴 사태였다. 과두정파에 밀리게 되자 민주정파는 코르키라로 가 도움을 청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없던 코르키라가 이를 섣부르게 거절하자 에피담노스 사절단은 이번엔 코린토스로 가 지원요청을 했고, 코르키라와는 달리 코린토스는 이를 즉각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엔 당시 코린토스의 국제적 위상 문제가 작용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 이전과 중반까지만 해도 코린토스는 부강하여 아테네, 스파르타에 비견될만한 강대국이였고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국가였으나 기원전 470년대 이후로 그 국력이 계속 쇠퇴하여 입지가 약해진 상태였다. 코르키라가 코린토스를 모욕적으로 대한 것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코린토스는 최소한 그리스 서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고, 이러던 차에 에피담노스 내전 사태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코린토스가 민주정의 편을 들어 에피담노스에 개입하자 처음에는 무관심했던 코르키라가 황급히 입장을 선회했다. 이번에는 에피담노스의 과두정 세력이 코린토스에게 밀려 불리해지자 코르키라에 도움을 청했고 코르키라는 이를 수용해 대함대를 에피담노스 앞바다에 출진시킨다. 이전까지 관심을 보이지 않던 코르키라가 이제와서 개입을 한 것은 라이벌인 코린토스의 상승을 막아야만 한다는 자존심 싸움의 문제였다. 이러자 사태는 자연스럽게도 단순한 분쟁이나 대리전이 아닌 본격적인 전쟁으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코르키라인들은 스파르타에 사절단을 보내어 스파르타의 중재를 요청했고 그동안 코린토스는 자신들의 모든 동맹국에 군자금과 함대의 원조를 요청했다. 스파르타는 어느정도 중재요청을 받아들여 코린토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코린토스는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코르키라의 우세한 해군력이 코린토스를 압도하는 듯 했다. 코르키라는 아테네를 제외한 그리스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대규모인데다 강력한 해군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여러 전쟁이나 분쟁들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소극적으로만 개입해왔던 덕에 온존한 전력을 계속 강화해 온 것이 이 섬나라가 당시 세계 제 2위 해군력을 보유한 까닭이었다. 코르키라는 펠로폰네소스 국가들 중 그나마 가장 해군이 강했던 코린토스의 함대를 첫 싸움이었던 기원전 435년 레우킴네Leukimne 해전에서 격파했고 육지에서도 코린토스 상륙군을 패퇴시켜 에피담노스를 확보했다.

하지만 코린토스는 이 패배에 자존심이 상해 오히려 더욱 호전적으로 나왔다. 레우킴네 패전 후 2년 동안 코린토스는 전보다 더 큰 규모의 함대를 건설하고 적극적으로 동맹국들을 설득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숙련된 노잡이들을 고용해 데려왔다. 코린토스의 동맹국들 중 메가라와 테베가 수십척 규모의 함대를 지원해주었고, 절치부심한 코린토스는 다시 대부대를 동원해 코르키라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위기감을 느낀 코르키라는 도움을 청하는 특사들을 아테네로 파견했다. 이 움직임을 감지한 코린토스도 동시에 특사들을 보내었고 양국은 아테네 민회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다.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머나먼 오지 에피담노스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발생한, 코린토스와 코르키라 사이의 국지전에 불과했던 사태가 보다 더 큰 무언가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코르키라와 아테네 사이에는 그때까지 어떠한 우호적인 관계도, 적대적인 관계도 없었다. 아테네인들이 코르키라인들에 빚진 것도 없었고 에피담노스에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아테네의 이해관계는 없었으며 기원전 445년 이래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대해 평화와 유화 정책을 유지해 왔었다. 이런 상태에서 코린토스 측 특사들은 코린토스가 기원전 440년 사모스 반란사태 때 아테네의 편을 들어 전쟁을 막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로부터 쌓인 아테네와 코린토스 사이 우호관계를 파괴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또한 에피담노스 사태에서 정당성은 코르키라가 아닌 코린토스에 있음을 주장했다. 그들은 이에 덧붙여 만약 아테네가 개입한다면 코린토스는 아테네를 복수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 또한 천명했다. 즉, 아테네는 코르키라에 빚진 것이 없음은 물론이고 빚진 것이 있다면 코린토스에게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코린토스 특사들의 설득이 없었더라도 아테네에게는 평화를 지킬 이유가 있었다. 아테네는 이미 구축해 놓은 제국과 상업활동을 안정적으로 굳히기 위해 지속된 평화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괜히 코린토스를 자극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체를 자극할 위험 부담도 피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세인들의 인식과 달리 강대국은 전쟁광이 아니다. 잃을게 많은 강대국은 위험을 피하려 하기에 전쟁을 마다한다. 아테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개입을 하게 되었다. 대체 왜?


코르키라는 민주주의 국가였고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아성이라는 위치에서 코르키라를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스파르타도 코린토스를 만류하는 상태에서 아테네도 자신들의 강대국으로써의 명예를 위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코르키라를 돕는 것은 '30년 평화 조약'의 조항 어느 것에도 위배되지 않았다. 코르키라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국이었고, 그러한 중립국과 동맹을 맺고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완전히 합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계 해군력 균형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코르키라의 함대는 무려 12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였다. 코린토스는 함대가 그보다 적었지만 동맹국들의 파병으로 인해 그 코르키라 함대를 압도할 가능성이 있었고 코르키라 본토에 대병력을 상륙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르키라 함대 전력이 잔류한채 코르키라가 코린토스에 점령된다면 그 해군력이 고스란히 코린토스, 나아가 펠로폰네소스 동맹 세력에 흡수될 위험이 컸다. 아테네에 파견된 코르키라 특사들이 강조한 점도 그것이였다.

다음은 아테네 민회에서 발표된 코르키라 사절단의 발언이다.

"Remember that there are but three considerable naval powers in Hellas, Athens, Corcyra, and Corinth, and that if you allow two of these three to become one, and Corinth to secure us for herself, you will have to hold the sea against the united fleets of Corcyra and Peloponnese. But if you receive us, you will have our ships to reinforce you in the struggle.
그리스(헬라스)에는 이렇다 할 해군국이 셋 있는데, 아테네, 코르키라, 그리고 코린토스로, 만약 그중 둘이 하나로 합쳐진다면, 다시 말해 코린토스가 코르키라 해군력을 확보하게 된다면, 당신네들은 코르키라와 펠로폰네소스의 연합 함대를 상대로 맞서게 될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들이 우리와 동맹을 맺는다면, 당신들은 앞으로 겪게 될 싸움에서 우리 함대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ook I, Chapter II


코르키라인들은 덧붙여서 아테네가 이르던 늦던 언제건 간에 미래에 스파르타, 나아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 경고하면서 그 미래의 전쟁을 대비해서라도 아테네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며, 코르키라와 연합하는 것이 그 일환이라 강조했다.



아테네의 강대국 지위는 아테네가 보유한, 동맹 세력의 것까지 다 합해 반올림하면 거의 400척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대함대에서 오는 것이었다. 아테네가 대함대를 보유하고, 펠로폰네소스는 육군이 강한 대신 보유한 해군력이 아테네에 감히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아테네와 그 제국은 안정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국제 해군력 균형은 그때까지 중립국이었던 코르키라가 더해지면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아테네의 국가안보가 코르키라의 해군전력이 온전히 보존되고 펠로폰네소스 측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아테네 민회에서는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보통 반나절이면 끝나는 정책토론이 수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태의 민감성을 아테네인들도 분명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코르키라를 도와주지 않으면 코린토스가 코르키라를 굴복시킴과 동시에 그 해군력을 흡수할 것이며 그렇게 강대해진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아테네에 싸움을 걸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코르키라를 도와주면 괜히 코린토스, 나아가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체를 자극해 그때까지 노력해 지켜온 평화가 깨질 수도 있었다. 어느쪽을 택해도 위험부담이 큰 상태에서 아테네는 코르키라를 도와주되, 극히 소극적인 중도 노선을 생각해냈다.

아테네는 코르키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공수양방 혈맹이 아닌 약식의 상호방위 조약의 체결이었다. 또한 위기에 처한 코르키라를 돕기 위해 아테네가 파견한 함대는, 그 수백척의 막대한 해군 함대 중에서 달랑 10척이었다. 겨우 10척 밖에 되지 않는 이 소규모 전대는 거의 상징적인 의미에 한정되었음이 분명했고 거기다 그 전대의 지휘관을 맡은 것은 親스파르타파 정권을 이끌었던 古키몬Cimon의 아들인 라케다이몬Lacedaimon이었다. 이름부터 라케다이몬이다. 라케다이몬은 '스파르타인'이란 뜻의 단어다. 그리고 그 라케다이몬에게 내려진 명령을 살펴보면 아테네의 의도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라케다이몬의 전대는 코린토스 함대가 명확하게 코르키라 본토에 지상병력을 상륙시키러 항진하지 않는 한 전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코르키라 본토가 위험에 처하지 않는 이상 코르키라를 돕지도 않을 것이며 행여나 도움을 주게 될 지라도 그 결정권자는 친스파르타파 지휘관이었다.

결국 아테네는 세계 해군력 균형의 변화를 억제하기 위해 코르키라를 돕되, 단순히 상징적 수준의 지원만을 보내어 코린토스에 대한 적대의사가 없음을 표명하고, 단순히 그곳에 함대를 보낸다는 행동 자체만으로 전쟁 억지력이 발휘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433년 9월 코르키라 앞바다의 시보타Sybota 섬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사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시보타 해전Battle of Sybota에서 코르키라 함대 110척과 코린토스 연합 함대 150척 (코린토스 90척, 동맹국 함대 60척)이 맞붙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곧 숫적으로 불리한 코르키라 함대의 패색이 짙어졌다. 이를 옆에서 관망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는 20척이었다. 처음에 10척만 보내놓고서 '그래도 10척은 지나치게 적은 것 아니냐'는 의견이 커지자 하는 수 없이 며칠 후 10척 더 추가파견했기에 늘어난, 그러나 여전히 의미없이 적은 숫자였던 20척.

헌데 이 20척의 아테네 함대는 코르키라 함대가 패배할 것처럼 보이자 '상륙전이 벌어지지 않는 한 전투 개입 불가'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투 구역에 돌진해 들어가 코린토스 함대 진열을 휘저어 나갔다. 당대 최고 수준의 조함술과 노잡이, 수병들을 가졌던 아테네의 함대는 소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코린토스 함대는 아테네의 개입에 놀라 즉각 후퇴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코르키라인들은 여세를 몰아 코린토스 함대를 추격 섬멸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아테네 함대는 코린토스에 그 이상의 피해를 입히지 않고, 코르키라인들의 추격도 만류했다. 전투에 어쩌다가 개입하긴 했으나 여전히 코린토스를 적대하는 것은 피하고자 판단한 결과였다. 결국 코린토스 함대는 별 피해 없이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코린토스인들은 아테네인들의 이 '배려'에 결코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사모스 섬 건으로 자신들에게 빗졌을 아테네가 이를 배신으로 갚았다고 여겨, 더 큰 모욕감과 분노를 품고 아테네에 대해서도 복수를 다짐했고, 이제는 이 전쟁을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펠로폰네소스-델로스 양대세력의 전면전으로 확대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미온적인 선택은 전쟁을 억지하지도 못했으면서 코린토스의 전력은 온존시켜주었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코린토스와 아테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아테네는 최소한 코린토스와의 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공공건축 프로젝트들을 잇다라 중단하고 재원을 저축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시에 아테네는 전쟁이 그보다 더 크게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자, 코린토스를 다른 국가들이 돕는 것을 억제하려 했다. 그래서 아테네는 상징적인 외교압박 카드를 내민다. 코르키라와의 전쟁에서 코린토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은 메가라Megara였고, 이 메가라를 압박하기 위해 아테네는 시보타 해전 몇 달 후인 기원전 433년 가을메가라 금수령Megaran Decree을 선포한다.

메가라 금수조치를 통해 아테네 시에 메가라 시민권자는 입장이 금지되었고 또 메가라 시민의 함선은 델로스 동맹에 속한 어떤 항구에서도 입출항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경제적 통상 제재조치였다. 이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 국가들은 문제가 있으면 협상해서 끝내거나, 아니면 중갑보병 호플리테스Hoplytes로 이뤄진 군대를 출병시켜 한타싸움으로 분쟁을 종결지었으면 지었지, 이런 식의 외교적 압박이란 상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테네의 메가라에 대한 통상 제재조치는 큰 실효도 없었던 것이, 메가라 (뿐만 아니라 다른 다수의 펠로폰네소스 국가들)에서 상업은 대부분 시민권자가 아닌 천한 하층민이나 노예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법적으로 따지면 메가라의 무역에는 실질적인 타격도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이 메가라 금수령 또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측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외교적으로 압박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온건한 중도 노선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30년 평화 조약에도 전혀 위배되지 않는 합법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메가라가 '아 그렇구나 코린토스를 도와주면 안되겠구나'하고 경고를 받아들였을까? 실질적인 타격도 입지 않은 메가라인들은 노발대발하며 코린토스인들과 힘을 합해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했고, 다른 여타 동맹국들에게 對아테네 전선에 합세할 것을 종용했다. 그 동맹국들,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이 메가라 금수령 때문에 아테네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반대로 코린토스와 메가라 등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때 즈음에 아테네 제국령이던 포티다이아Potidaea가 아테네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원래 코린토스계 정착민들이 세운 도시였던 포티다이아는 아테네의 속국이었으면서도 유난히 親코린토스적 행보를 보였던 곳이였는데, 이들은 코린토스인들의 사주를 받아 反아테네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미리 감지한 아테네는 포티다이아에 특사를 파견하여 당장 코린토스 외교관들을 추방하고 아테네에 인질을 제공하며 또한 항구를 감싼 포티다이아의 해안방벽을 철거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테네가 이 명령을 내리면서 어떠한 물리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아테네는 아마도 미리 군사력을 투입해 제압하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국가들을 자극하게 될까봐 염려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포티다이아는 겉으로는 이에 따르겠다는 것처럼 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코린토스 인들은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아테네가 포티다이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코린토스의 병사들이 비밀리에 포티다이아에 잠입해 반란세력과 합류했다. 이는 30년 평화 조약의 조항,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은 서로의 세력권과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기원전 432년, 아테네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을 때는 이미 포티다이아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봉기한 후였다. 이후 아테네는 포티다이아를 함락하기 위해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 그리고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고있는 동안 스파르타의 입장도 변화했다. 본래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코르키라의 중재요청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코린토스를 만류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실질적으로 코린토스나 메가라의 호전적 행동들을 막거나 처벌할 수단이 없었고, 되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아예 아테네를 지금 기회에 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전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리되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사절들을 파견해 30년 평화 조약에 명시된대로의, 평화적 협상 중재안을 함께 이행할 것을 촉구했으나, 스파르타는 무시하며 답을 거부하고 기다렸다. 기원전 432년 4월에 포티다이아가 드디어 봉기했다. 스파르타는 포티다이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는 결정을 굳히지 못해 미적대다가 그해 7월이나 되어서야 펠로폰네소스 전체 동맹국들의 회의를 주최한다.

스파르타에 모인 동맹국 대표단들 중에서 코린토스와 메가라는 적극적으로 아테네의 '침략야욕'과 '주권침탈'을 맹 비난하며 동시에 아테네의 현 강성함을 지금 꺾지 않고 놔둔다면 스파르타가 불리해 질 것이라는 부정적 미래 전망을 거듭 강조했다. 이들은 아테네와의 전쟁이 필수불가결한 일일 뿐 아니라 더이상 늦춰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코린토스를 돕고 있던 테베Thebe도 주전론에 가세했다. 테베는 보이티아-아티카 국경지대에 위치한 플라타이아Plataea를 위시한 주변 영토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영토확장을 위해 아테네와의 전쟁을 원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매파적인 주전론에 설득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테네가 아무리 해군이 강해도,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아테네로 쳐들어가 별 볼일없는 아테네 육군과 대결해 쳐부수면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냐는 의견이 큰 동조를 얻었다.

이 스파르타에서 열린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체회의에는 초대받지 않은 아테네측 특사도 참가하고 있었다. 이 아테네인은 투키디데스의 서술에서 스스로를 '그냥 업무차 지나가던 아테네 시민권자인 상인'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역할을 볼 때 그는 '업무차 지나가던 상인'이 아니라 아테네가 의도적으로 파견한 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아테네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만약 전쟁이 정말로 일어나게 된다면 아테네는 전력을 다해서 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의 발언은 격정적인 코린토스(와 그 친구들) 측의 선동에 비하면 무미건조했고, 이에 설득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전쟁을 결의하게 한 것은 아마도 코린토스의 선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코린토스는 이번 기회에 스파르타가 동맹국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코린토스와 그 동조국가들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함께 탈퇴해버리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신연맹을 창설할 것임을 암시하며 협박했다. 그것은 스파르타에게 있어 체제붕괴에 대한 위협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전쟁이 결정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432년 7월에 당장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고양된 분위기가 어느정도 가라앉자 스파르타 내 상황이 조금 바뀌어, 온건파이던 아르키다무스 왕 주도로 재협상이 시도되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다무스 왕에 대해 적으며 그가 동맹국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그들의 화를 누그러뜨리려 애썼다"고 한다. 아르키다무스는 만약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경우 주전론자들의 주장처럼 단기결전이 아닌 장기간의 값비싼 투쟁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에게 있어서도 아테네와의 전쟁은 피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이고, 동시에 30년 평화 조약을 먼저 깨트린다는 법적 책임을 지기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미 전쟁을 결의해 놓았는데도 스파르타는 그때까지 아테네의 협상안을 거부하기만 하던 태도를 바꾸었고, 몇달에 걸친 협상 과정에서 여러차례 아테네와 왈가왈부한 끝에, 상당히 양보하여 "메가라 금수령 하나만 철회한다면 전쟁은 없을 것"을 선언했다. 아테네가 요청하던 30년 평화조약 대로의 중립적인 중재안은 끝까지 거부했지만 어쨌던 단순히 메가라 금수 하나만 중단한다면 스파르타가 알아서 책임지고 코린토스와 그외 동맹국들을 설득할 것이라 장담했다. 이것이 스파르타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까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아테네가 입장을 선회한다. 아테네는 메가라 금수령을 철회하길 거부했다. 그것 하나만큼은 결단코 불가하다며 반대했다. 물론 스파르타 측이 보여준 상당한 양보에 설득된 이들도 많았고 법령 하나를 철폐하는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전쟁에 돌입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많아 격론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결국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요구를 거절해버린다. 표면적인 이유는 스파르타의 최후통첩 직후 있었던, 아테네의 소위 '제 1시민'인 페리클레스Pericles의 연설에서 드러난다.

"The treaty provides that we shall mutually submit our differences to legal settlement, and that we shall meanwhile each keep what we have. Yet the Lacedaemonians never yet made us any such offer, never yet would accept from us any such offer; […] I hope that you will none of you think that we shall be going to war for a trifle if we refuse to revoke the Megara decree, which appears in front of their complaints, and the revocation of which is to save us from war, or let any feeling of self-reproach linger in your minds, as if you went to war for slight cause. Why, this trifle contains the whole seal and trial of your resolution. If you give way, you will instantly have to meet some greater demand, as having been frightened into obedience in the first instance; while a firm refusal will make them clearly understand that they must treat you more as equals.
(30년)평화조약은 우리 양국이 공동으로 분쟁을 법적 중재로 해결하고, 서로가 서로의 것을 인정함을 적고 있습니다. 허나 스파르타인들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중재안도 내놓지 않았고, 우리의 그러한 중재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중략)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우리가 메가라 법령을 철회하지 않아서, 그들의 주장대로 법령 하나만 철회하면 전쟁을 피할,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문제로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냐, 이 ‘사소한’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확신과 결단을 시험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에게 양보한다면, 그 양보가 겁에 질려 굴종한 것이기에, 여러분은 더 큰 또 하나의 양보를 요구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확고히 거절해야만 그들에게 그들이 우리를 대등한 존재로 대접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Book I, Chapter V



다시말해 이 메가라 금수령 고수는 원칙의 문제였으며, 스파르타의 위협섞인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국가위신에 손상이, 그리고 미래에 스파르타의 강경화로 인한 안보의 위협이 올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번 양보하면 상대는 앞으로 더욱 강경하게 나올 것이다란 예측은 합리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도 페리클레스나 아테네는 '전쟁'과 '스파르타 격파'를 부르짖지 않는다. 그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대등한 존재로 대접해 줄'것을 위해서 전쟁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다. 이렇게 전쟁을 받아들인 태도에는 페리클레스가 수립한 신전략의 영향도 있었다. 다시 말해, 표면적 이유 외에도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을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가 수립한 신전략은 당시 개념으로는 상상해내기 어려운 것이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측이 당당히, 명예롭게 들판에서 만나 창과 방패로 자웅을 겨루는 회전으로 종결된다는 당시 개념에 따라,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의 강력한 육군을 미약한 아테네가 직접 상대한다면 일전완패는 뻔한 결과였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아무리 아티카 지방으로 쳐들어온다해도, 아테네는 야전을 거부하고 성벽 뒤에 틀어박힐 것이었다. 야전을 거부하면 스파르타군대가 아티카의 경작지들과 목초지, 마을들을 불사르고 약탈할 터였으나 아테네는 어차피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해외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었고, 당시 기술과 전술로는 군대가 성벽을 뚫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니 야전을 무조건 거부하고 그 막강한 해군력을 통해 펠로폰네소스 지역 전체를 무대로 삼아, 해안가에 신출귀몰 상륙하여 기습하고 약탈해 스파르타를 서서히 지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스파르타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고와 대등한 조건에서 다시 협상한다는 것이 페리클레스 전쟁 전략의 주된 골자였다.

이는 매우 값비싼 전략이기도 했다. 그 거대한 해군을 움직여 장기간 작전하며 드넓은 지역에 걸처 동시다발적 상륙전을 벌이고 적을 괴롭히는, 장기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테네에게는 그런 비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아테네는 대적할 자가 없는 최고 수준의 해군을 그것도 최대규모로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쌓아올린 막대한 재력이 있었다. 아테네 국고에는 6천 탈란트에 달하는 재화가 있었고 1년 국가수입은 1천 탈란트에 달했다. 1 탈란트가 주력 전선 1척을 한달 동안 운용할 수 있는 액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결함이 하나 있었으니, 이는 페리클레스의 전쟁전략이 승리의 전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는 목표도 방법도 없이, 싸움을 피하며 오래끌어 적을 지치게 만들어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든다는 요지의 전략은 적극적인 전쟁수행이나 승전확신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외교적 노력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시간은 흘렀다.

기원전 431년 3월, 테베는 평소 넘보던 아티카 북부의 아테네 속국 플라타이아를 기습공격했다. 이는 더이상 스파르타가 발뺌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조처였다. 스파르타는 그러고나서도 한 달 이상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431년 5월 에 아티카 침공을 개시했다. '30년 평화'가 지속된 시간은 30년은 커녕 그 반도 못된 14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전쟁은 27년이나 흐른 후인 기원전 404년 4월 25일 아테네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결되게 된다. 아테네는 제국의 고질적 불안요소들 때문에 무너졌다. 생명줄이던 다르다넬스 해협을 펠로폰네소스 해군이 틀어막고 제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반란이 발생함으로써였다. 스파르타 또한 승전국이 되긴 했으나 아테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체제 한계 때문에 무너졌다. 아테네와 싸우느라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해버린 후, 그 사이에 어부지리를 본 테베가 동맹 내에서 지나치게 강력해진 덕분에 체제가 붕괴했고 이어서 테베가 걸어온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테베의 그리스 제패도 오래가지 못했고, 국왕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성해진 야만국 마케도니아가 남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해 전역이 만신창이가 된 그리스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후 그리스 세계는 번영을 되찾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양극체제가 평화 속에 공존하려 했던 30년 평화조약은 14년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필사적으로 경주한 것은 의외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그러나 그러한 외교적 노력들은 쌓여가기만 하는 국가 규모의 오해의 연쇄적인 확증 때문에 뒤흔들린 균형을 바로잡는데 역부족이었다.

코린토스는 코르키라에 대한 증오심과 자존심, 자국의 위신과 명예를 높이겠다는 열망에 매달려 앞뒤 재보지도 않고 저돌맹진했다. 이들은 좁은 시야로 자신들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결과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모험이 세계 균형을 흔들 것이라는 예상 없이 전쟁을 개시했고, 아테네가 개입되자 아테네의 모든 외교적 노력들을 무시한 채(애초에 인지하지 못한 채) 복수에 매달려 다른 국가들을 선동했다.

아테네의 경우, 코르키라에 관심도 없고 코린토스와 싸우고 싶지 않았음에도 코르키라 국력의 특수성 때문에 사태에 마지못해 개입했으며, 마지못해 개입했기에 취한 노선들도 모두 온건하고 미온적인 중도 노선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도 노선들, 은 모두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신호'를 보내려는 아테네의 창의적인 노력의 결과물들이였다. 허나 아테네만큼 창의적이지 못했던 상대국가들은 아테네의 신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말은 시보타 해전과 메가라 법령과 포티다이아 통첩으로, 모두 상대방을 극도로 자극하기만 했다. 만약 아테네가 그런 주요 분기점들에서 '중도 온건' 노선을 택하지 않고 좀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아테네가 시보타 해전에 앞서 달랑 20척이 아닌 수백척의 대함대를 파견해 전장을 압도했다면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결의를 보고 전투 없이 물러섰을까? 만약 아테네가 그 강력한 국력을 활용해 위협과 함께 확실한 코린토스 지원 자제 요청을 메가라 등에 전달했다면 메가라가 그렇게 자극되었을까? 만약 포티다이아에 무력 없는 통첩을 전하는 대신 진작에 막강한 전력으로 일거에 제압해버렸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외교적으로 복잡한 방법들을 택하던 아테네는 자신들이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계산해 택한 정책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전달하여, 상대방도 자기들처럼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아테네의 의도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하는 우를 범했다. 이것이 아테네의 실책이었다. 그보다도 더 큰 실책은, 기왕 택한 외교적 해결방안을 끝까지 일관되게 밀고 나가지도 못한 채 최후에는 전쟁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그 전쟁조차도 확실한 승리전략이 아닌, 자신들의 국력을 바탕으로 한 불확실한 미래예상에 근거해 결심했고, 그런 전략만으로도 스파르타를 다시 협상에 나서게 만들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전쟁 내내 한번도 스파르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기존 그리스 세계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테네의 신개념 전쟁전략을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기에 그들은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테네는 최소한 14년 평화 기간 동안 아테네는 한번도 영토확장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 스파르타는 코린토스같이 '힘을 가지되 책임은 지지 않는' 국가의 저돌맹진에 질질 끌려다녔다.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게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코린토스를 강력하게 제어하지 못했다. 막판에 가서는 코린토스를 어떻게든 설득하겠다 선언했으나 그런 노력은 이미 한참 때를 놓친 후였다. 그럴 수 있었으면 어째서 진작에 강경하게 나서지 못했는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도국이자 중심점이라는 그 위상에 맞게 행동해야 했고, 그만큼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맹국들에 어영부영 끌려다니던 것이 강대국이라던 스파르타의 실체였던 것일까. 여기에 미래에 아테네가 더욱 성장하면 스파르타 국가안보가 뒤흔들릴 것이라는 불확실한 예측과 불안감이 스파르타를 전쟁으로 밀어넣었다.

이렇게 평화가 실패하고 전쟁이 발발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국제관계와 균형 유지를 위해 수행되는 외교적 노력들에 대한 숙고를 해볼 수 있다. 오늘날 국제관계학에서는 국가라는 존재를 이성적,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으로 가정한다. 같은 정치체제(민주주의)와 경제구조(자본주의)를 가진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같은 이론에서 보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때로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감정의 힘, 자존심과 국가위신같은 문제만으로 무모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또한 자국의 냉철한 논리에서 비롯된 외교정책을 타국도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는 외교정책도 빗나가기 쉽다. 결국 외교 정책도 그 외교 대상에 따라, 상대의 수준에 따라 강도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들은 그 동맹국들을 좌지우지 하는 대신 때로는 그 동맹국들에 의해 끌려다닐 수도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하기도 한다. 마치 오스트리아에 끌려 전쟁에 말려 들어간 1차세계대전의 독일이나, 이스라엘에 묶여, 이스라엘이 아무리 저돌적으로 행동해도 따라가는 오늘날의 미합중국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고민해 보자.

그래서 과연,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는가?




참고문헌:
De Ste. Croix, G. E. M. 1972. The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Hale, John R. 2009. Lords of the sea: the epic story of the Athenian navy and the birth of democracy. New York: Viking.
Kagan, Donald. 1995. On the origins of war and the preservation of peace. New York: Doubleday.
Kagan, Donald. 2003. The Peloponnesian War. New York: Viking.
Thucydides, Rex Warner. 1972.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1월 24일에 있었던 이글루스 역사밸리 콘서트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포스팅입니다*
*그러나 발표와 달라지거나 보강된 부분도 많이 있으니 이미 발표를 들으셨던 분이라도 읽으시면 좋습니다.*
*글이 길다고 볼드체로 쓴 부분만 슥슥 보며 지나가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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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시쉐도우 2012/11/30 22:05 #

    잘 읽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교과서나 몇몇 책에서 읽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스파르타도 동맹국들에게 휘둘려서 전쟁에 말려들게 된 줄은 몰랐습니다.
    현대 국제정치 상황에서도 코린토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나라 및 세력들이 좀 있는 것을 보자면, 참 강대국으로서도 골치아프겠다 싶습니다. 강대국의 거대전략을 휘두르는 작은 나라들이라니,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인 듯 하지만, 그게 현실일테니까요.
  • 漁夫 2012/12/01 15:18 #

    참조문헌 중 D. Kagan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런 광경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번역도 있고요.
  • 시쉐도우 2012/12/01 20:05 #

    어부님의 추천, 감사합니다. 지금은 시간관계상 어려우나, 시간 여유가 생기면 찾아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셔먼 2012/11/30 23:00 #

    타국민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적 외교만을 고집한 아테네도 문제요, 특유의 기형적 사회구조로 인해 종속국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닌 스파르타도 문제요, 아테네의 대응이 어떠한 외교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나선 코린토스도 문제니 이거 어느 쪽에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군요.
  • 해색주 2012/11/30 23:04 #

    잘 읽었습니다. 아테네의 외교술이 지나치게 세련된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처음부터 힘으로 눌렀으면 좀더 일관적이지 읺을까 싶습니다. 북한을 다루는 한국의 모습 같기도 하고.
  • daswahres 2012/11/30 23:30 #

    이걸 읽기 전까지는 아테네가 호전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임한줄 알고있었습니다.-_-;;
    굉장히 소극적이었군요.
  • 앨런비 2012/12/01 09:26 #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호전적으로 싸운 때는 사실상 클레온이 페리클레스 전략을 수정할 때 뿐입니다-_-;;;; 그 유명한 '2차' 시칠리아 원정도 호전적이라고 하긴 힘들어요. 애초부터 '1차' 시칠리아 원정의 연장판이고, 그 과정도 투키디데스가 헑헑 빨아댄 니키아스의 뻥카로 이상하게 되버린 것이라서요.; 애초에 아테네의 목적은 시칠리아 점령이 아닌 시칠리아의 반-시라쿠사파와 연합해 시라쿠사를 누른다 정도였습니다.;;;
  • daswahres 2012/12/01 17:34 #

    아... 역사가가 대놓고 반 아테네이다 보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군요. 거참... 역사서의 쓰여있는 진실도 주관이 섞여있어서 무조건 대놓고 받아들이면 안되는군요.
  • 앨런비 2012/12/01 21:31 #

    반 아테네보다는, 귀족적이면서 니키아스 빠돌이었던게 문제죠. 클레온을 매우 혐오하고. 멜로스 사건도 솔까말 아테네가 유달리 잔혹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전투인 플라타이아이 전투부터 테베가 플라타아이아이를 함락 후 파괴하고 노예화 시킨 것이에요 ㄱ-
  • 2012/11/30 23:3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12/01 11:0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零丁洋 2012/12/01 00:01 #

    하나의 세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테네는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아테네의 경거망동은 달로스 동맹에 치명적일 수 있죠. 그들이 가능한 이성적였던 것도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깨지기 쉬운 구조에 있다고 봅니다. 각국은 자국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관계의 교란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각 국이 동맹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파동이 연쇄적인 파동을 일으키며 증폭시킨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에너지가 위험한 균형을 겨우 이루고 있는 곳에 살고 있죠. 만약 이런 위험한 균형을 관리하지 못하고 사소한 선동에 철없이 경거망동한다면 어쩌면 한반도는 양대 세력의 군사적 활성 단층지대가 될 수 있죠.
  • DeathKira 2012/12/01 01:17 #

    이렇게 놓고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원치 않은 전쟁에 휘말려들어간 듯한 인상을 주는군요. 어찌보면 유화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강대국이 그것을 거부하는 중소국가에 의해 휘둘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강대국이 중소국가의 의지를 멋대로 정하는 게 옳은가란 문제도 생각해봐야겠지만, 평화를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테네에게도 어느정도 동정표를 주고 싶은게 사실입니다. 이 이후의 전개에서 보인 아테네의 강경하고 잔혹한 조치는 어찌보면 유화적인 정책으로 실패를 맛본 반동이 아닐까 싶네요.
  • 앨런비 2012/12/01 0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맹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버티는 것은 가능한데 이길 수는 없고, 1차대전 때에 나온 말처럼 그렇게 전쟁이 오래갈 줄은 몰랐다는 것이죠. 윗 글에서 나온 3단노선의 운영비와 아테네의 금고, 연수익을 비교해서 계산하시면 대략 나올 것입니다. 200척의 3단노선을 6개월간 운영하면 벌써 1200탈렌트죠. 즉 페리클레스 전략은 5년을 버티기도 힘들었던 전략입니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아테네의 역병으로 대타격까지 입고 페리클레스마저 사망하자 아테테는 전쟁수행의 방법을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죠. 여기서 투키디데스가 대표적인 중우정치가로 묘사한 강경파 클레온과, 선인으로 묘사한 온건파 니키아스의 대립이 시작되고, 페리클레스 사후 클레온 주도의 강경책이 시작됩니다. 동맹국들을 삥뜯는 대신 제대로 싸우자는 것이죠. 근데 아테네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클레온의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고요. 하지만 아테네의 강경파 클레온과, 스파르타의 강경파 브락시다스가 동시에 전사하면서 온건파 니키아스의 주도로 니키아스 화약이 이뤄지죠.

    ...하지만 이 때부터 알키비아데스의 X맨짓이 시작됩니다-_-; 글고 이 글에서 중점인 외교적인 문제로 하자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소속국이지만 수시로 스파르타와 대립하던 아르고스가 동맹기한 연장을 거부하고 민주정파와 과두정파의 대립이 일어나면서 전쟁은 재발하죠. 그 주역중 하나가 알키비아데스. 하지만 이 과정도 강경파니 뭐니 하긴 좀.;

    ...글고 제대로 망친 것이 바로 니키아스죠. 시칠리아 원정의 삽질은 투키디데스의 쉴드짓 때문에 그냥 아테네 제국주의나 알키비아데스 ㅆㅂㄹㅁ로만 할 때가 많은데. 니키아스의 개삽질이 시칠리아 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파탄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로 아테네는 속국들을 진압해야 되었던 것이죠. 그래도 개길만큼 개겼습니다. 속국들도 대부분 진압을 했었었고요. 다만 페르시아의 쩐지원과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중우정치 삽질로 결국 이후 해전에서 깨지고 항복한 것.;

    예전에 쓴 글이 상당히 연관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http://hyukjunseo.egloos.com/3341832
  • Allenait 2012/12/01 09:29 #

    서로간의 실수와 탐욕이 만들어 낸 피묻은 협주곡이었군요.. 동시에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게 없는것 같네요
  • caffeine 2012/12/01 09:42 # 삭제

    너무 좁은 지역에 당대 기준으로 너무 문명화된 도시국가들이 다극체제로 나뉘어 있다가 모두 함께 동귀어진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안습의 그리스 그리고 승리의 마케도니아ㅠㅠ
    그래도 아테네가 시칠리아에서 아주 대규모의 삽질을 하지 않았다면 약간은 다른 결과가 있진 않았을까 합니다...
  • 행인1 2012/12/01 11:00 #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그리스 세계의 운명을 뒤바꾼 대전쟁이 일어난 셈이군요.
  • 냉동만두 2012/12/01 15:16 # 삭제

    길고 유익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전략이나 외교도 상대에 맞는 걸 써야한다는 적절한 예시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파파라치 2012/12/02 03:30 #

    조지프 나이 교수가 저술한 "국제문제의 이해"에서 되풀이되어 강조되는 사례가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 과정이지요. 양대 동맹세력의 존재, 전쟁의 필연성에 대한 예견과 이에 따른 예방전쟁의 필요성의 대두, 주변부에서의 사소한 분쟁이 강대국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과정, 어정쩡한 전쟁목표와 이에 따른 전쟁의 장기화 등, 국가간에 일어나는 분쟁의 고전적 사례가 된 사건이니까요.

    p.s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계속 올려주세요~
  • 누군가의친구 2012/12/02 09:20 #

    그때도 들었지만 포스트때문에 다시금 차분히 정리할수 있었습니다.
  • 루드라 2012/12/04 23:24 #

    예전에 외교관 누군가가 EBS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현대 외교를 비교해서 얘기하던게 기억납니다. 그때 얘기하던 주제도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얘기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가 하는 내용이었던 거 같습니다. 다만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아테네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가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얘기하더군요.

    보기는 올려주신 그날 보고 답글은 이제야 다는군요. 다른 걸로 바빠서 이거 읽고 번외편도 못읽고 바로 끊었다가 이제 겨우 재접속 했습니다. 이제 번외편 읽으러 가야겠네요. ^^;
  • 월광토끼 2012/12/04 23:46 #

    아테네에 대한 두려움을 코린토스와 그 동맹국에서 온 특사들이 정말 열변을 토하면서 자극했죠. '당신네들은 보수적이고 아테네인들은 진보적이기 때문에 당신네들 밍기적거리다간 아테네한테 홀랑 당한다니깐요!?' 로 요약될 말들을 아주 청산유수로 하면서 스파르타인들을 현혹했습니다. 번외편도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
  • 마무리불패신화 2012/12/04 23:48 #

    1. 페리클레스의 위치를 어떻게 봐야 하나요??? 물론 아테네를 이끌었던 인물이라는걸 모르는 건 아닌데, 아테네는 당시 직접 민주제를 택하고 있었기에 대표가 없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2. 이건 본문과는 상관 없는건데, 현재의 마케도니아는 뭘 믿고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쓰는 거죠???

    3. 코르키라는 델로스 동맹 쪽에 가까웠나요, 아니면 펠로폰네소스 동맹 쪽에 가까웠나요??
  • 월광토끼 2012/12/04 23:58 #

    대표가 없고 매해 여러 공직자를 뽑았고 이 중 군대 지휘권도 가졌고 가장 강한 위치와 영향력을 가진 것이 '장군(Strategoi)' 열 명이었습니다. 이 10인의 장군들은 서로 동등한 권한을 가졌으나 그 중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며 1년이 아니라 십수년간 연속으로 선출될 만큼 인기가 되는 인물이 어쩌다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페리클레스였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물론 헌법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당시 아테네의 제 1 시민 대접을 받으면서 사실상 오늘날 현대 민주정의 대통령급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가문이 좋고 본인 능력이 유래가 없는 수준이었고 말입니다.

    이 페리클레스가 죽고 난 다음부터는 그렇게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이가 없어 고만고만한 중급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찢어져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 정책이 오락가락했고 말입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국토는 실제로 고대 마케도니아 지방이였던 곳의 절반에 해당하는'상上마케도니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오늘날의 그리스 땅에 흡수 되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일부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미개한 야만인들의 땅으로 생각했고 말입니다. 인종적으로는 트라키아인들에 해당했는데 이 트라키아인들은 서로마 멸망 후 점차 슬라브화 되어 고유 문화는 사라졌습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쓰는데는 별 문제는 없습니다.
  • ㄱㄴㄷㄹ 2013/02/14 13:30 # 삭제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요 포인트를 잘 지적해서 쓰셨네요. 다만 글의 몇몇 부분은 케이건이 그의 책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주장한 부분을 채용한듯 합니다. 블로그의 글이 학술논문이 아니니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작성한 내용은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참고문헌을 명기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논지 부분을 명확히 밝힌 건 아니니까요. 이 부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글은 그저 책소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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