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런던 진공

[Prince Rupert]



1642년 10월 23일의 엣지힐 전투가 종결된 직후, 에섹스 백작은 첫 전투를 치르고 지친 의회군을 이끌고 전장 북쪽의 워릭Warick방면으로 이동한다. 에섹스 백작의 군세는 비록 엣지힐에서 2천명에 근접하는 사상 피해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상당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무승부였을지라도 예기가 꺾이기엔 충분했던 전투 결과 때문에 수세적 입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군기들과 지휘관의 개인 화물은 물론이고 탄약과 화기 등의 보급품들이 루퍼트 공 휘하 기병대에게 약탈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워릭으로 퇴각하는 의회군의 후미를 국왕군 루퍼트의 기병대가 계속 괴롭힌 것으로도 보아, 비록 무승부였을지라도 국왕군 측이 미세하게나마 유리한 결과를 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적하던 에섹스의 군세가 북쪽으로 비켜나감으로서 국왕군 앞의 런던으로 가는 길이 뻥 뚫렸다. 이로써 국왕군은 옥스퍼드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루퍼트 공은 국왕 찰스에게 이 기회와 여세를 몰아 즉각 런던으로 진공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는 의회군이 재집결하기 전까지 한시가 급하니, 전군으로 런던에 진격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자신이 3천 명의 기병과 승마보병을 편성해 먼저 런던으로 내달려 기습적으로 런던을 장악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망설였다. 엣지힐 전투 직전까지만 해도 왕권을 위해서라면 반항하는 누구든지 베어넘기겠다는 식으로 의욕적이었고 굳게 결단을 내린 것 같았던 국왕은 포화 속의 격렬한 혈전과 그 후 전장의 참상, 전장에 쓰러진 자기 신하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찰스는 루퍼트의 계속되는 간언에도 불구하고 이 내전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거나, 또는 런던에 진압군으로서 진공하는 것을 (이제와서 새삼) 거북해하며 소심해진 것이다.

런던은 잉글랜드, 나아가 브리튼의 수도이자 수도라는 의미를 빼더라도 최대 인구 밀집 지역, 행정 중심지, 경제 상업 중심지, 물류 집결지이자 가장 정치적인, 유일무이란 의미를 지닌 도시였다. 런던을 장악하지 않는 이상 승리란 있을 수 없었다. 그 런던으로 향한 길이 비워졌고, 의회군의 주력부대가 비켜서 있었던 그 상태에서 만약 찰스가 루퍼트의 전략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찰스는 엣지힐 전투가 벌어진 후로도 사흘을 망설이다가 결국 루퍼트의 안건을 기각했다. 대신 전군이 천천히 주변 지역들을 제압해 나가면서 진군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에섹스 백작의 의회군도 워릭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국왕군에 잉글랜드 남동부를 다 내줄 수는 없었던 에섹스도 워릭을 떠나 런던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회군은 상당한 물자가 있던 밴버리가 국왕군에 무혈 점령되도록 허용했다.밴버리 뿐 아니라 각지에서 의회군 수비대가 퇴각했고 리딩, 우스터Worcester가 국왕군의 손에 들어가는 등 , 전략적인 균형이 일시적으로 한쪽에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판세에는 포윅 교橋 전투와 엣지힐의 전과가 큰 역할을 했다.


[엣지힐 전투 전후 양군 이동경로]



한편 수도 런던에서의 사정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당시 런던에서는 내전에 대한 흥분으로 온갖 헛소문이 나돌고 공기도 흉흉한 상태로, 부정확한 정보가 마구잡이로 들어오고 퍼지는 상태였다. 엣지힐 전투가 벌어지기 사흘 전에 런던에서는 이미 대전투가 벌어져서 의회군이 피로스식 승리를 거두어 루퍼트는 죽었으며 찰스는 포로로 잡았다는 뉴스가 퍼졌고 전투 당일에는 의회군이 압도적으로 국왕군을 분쇄하여 루퍼트를 포로로 확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랬다가 그 다음날에는 엣지힐에서 루퍼트의 기병대에게 패주해 일찌감치 전장을 이탈한 사람들이 런던에 도착해, 자신들의 창피함 때문에 적전도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회군의 전선붕괴를 과장해서 보고했다. 같은 날에 의회는 자세한 설명은 없이 의회군의 대승을 발표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런던 시민들은 기쁨에 겨웠다 절망에 떨어졌다 갈팡질팡해야했다. 이러한 혼란은 어느정도 옥스퍼드 등 국왕지지 지역들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엣지힐 전투 경과의 보다 공정하고 정확한 소식이 들어온 것은 11월 2일이나 되어서였다.

그와 동시에, 같은 날 웨스트민스터는 격론 끝에 (엣지힐 전투의 무승부적 결과에 실망하여) 국왕과 다시 평화 협상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하원은 존 이블린 경과 그 외 하원의원들을 왕에게 대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국왕은 의회의 사절단을 그들이 왕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들이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쫓았다. 국왕군은 진격을 계속했다. 사절들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교섭을 시도하자 국왕은 11월 11일에는 '원론적으로는' 평화 협상에 동의하며 윈저 성을 협상 장소로 제안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쪽이 교전의 일시중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협상을 말하면서도 양측은 전투를 준비했고 국왕도 무장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협상에 동의한 바로 다음 날인 12일에는 악명높은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루퍼트 공이 이끄는 기병대는 언제나 본대보다 앞서가며 진격로를 확보하며 런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산발적 교전들을 벌였는데, 이들은 11월 12일에 런던에서 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브렌트포드에서 소수의 의회군 수비대와 맞닥뜨렸다.* 그러나 덴질 홀즈와 로버트 그렌빌, 존 릴번 등이 이끄는 이 수비대는 루퍼트의 기병대가 기병도를 휘두르며 돌격하자 즉각 무너져 패주했다. 그 몇 명의 지휘관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부대를 추스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뒤도 안돌아보고 전장을 이탈했으며 국왕군이 즉각 마을을 접수했다. 브렌트포드를 점거하자마자 루퍼트는 부하들에게 '보답'을 배풀었고, 루퍼트의 부하들은 즉각 브렌트포드의 집들에서 천, 옷, 음식, 금품, 가구 등등을 자비없이 약탈했다. 마을 주민들의 간청도 소용없었고 국왕군에게 매달리던 몇 주민들은 기병도에 살해당했다.

실제 브렌트포드의 약탈이 어느정도 규모였는지,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오로지 의회측 팜플렛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알기란 힘들다. 그러나 의회파 극작가이자 역사가였던 토마스 매이Thomas May는 11월 12일이 'Plunder'라는 명사가 영어에 처음 소개된 날이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는 그 단어가 이미 1630년대, 독일로부터의 끔직한 소식들이 영국에도 전해지면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되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그 단어가 '현실'의 일부가 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브렌트포드 약탈에 관한 소식은 그때까지 방황하던 런던 시민들과 그 수비병력을 결집시키고 투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런던 시민들은 자원하고 나서서 합심해 런던 진입로의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쌓고 참호를 파고 포대를 설치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 런던 북쪽 지역에서 방황하던 에섹스 백작과 그의 의회 주력군이 런던으로 귀환해 런던 민병대 (트레인드 밴즈London Trained Bands)와 합류했다. 국왕이 미적대며 며칠을 지연한 결과 덕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1642년 11월 13일 일요일에 국왕군 1만 3천명이 런던 입구의 터넘 그린Turnham Green에 당도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런던, 허트포드셔, 서리 등 주변 각지에서 모인 민병대들과 에섹스의 의회군 본대 총합 2만 3천 명의 병력이었다. 이 마주침을 터넘 그린 전투Battle of Turham Green이라 부른다. 그러나 터넘 그린 전투는 Battle 이 아닌 Non-Battle 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화창한 가을의 일요일 아침 날 양 군대가 마주보고 섰다. 필립 스키폰을 비롯한 의회군의 장교들이 전선 곳곳을 돌며 병사들의 시기를 복돋는 소리를 빼면 정적이 이어졌다. 화려한 대전투를 구경하기 위해 마실나온 런던 시민들이 전장 한켠에 우 몰려서 기다렸으나 오후가 되도록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그들이 기다리다 지쳤을 때 행상인들과 인근 선술집 주인들이 수레에 빵과 고기와 과일, 포도주 병들과 맥주통들을 한가득 싣고 와 관중들에게 판매했다. 관중들이 먹고 마시며 즐기고 나서도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국왕군이 천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의회군은 후퇴하는 국왕군을 건드리지 않았고 관중들은 실망해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국왕군의 절반 정도는 엣지힐 전투에서 탄약의 소모가 극심했기에 제대로 교전하기에는 비품이 부족했고 두배나 되는 의회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물론 의회군은 엣지힐 전투에 참전했던 부대들과 몇개의 잘 훈련된 런던 민병연대들을 제외하고는 급히 징집되거나 자원한, 전투 경험이 없음은 물론이고 훈련도 되어있지 않은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지휘체계도 확실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은 이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국왕의 보좌관들 몇몇은 그런 시민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런던의 일반 시민들을 즉각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기에, 일반 시민들의 지원 없이 런던을 점령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조언했고 국왕은 이 조언을 따랐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의회 의원이자 지휘관인 존 햄덴John Hampden과 올리버 크롬웰이 에섹스 백작에게 후퇴하는 국왕군을 추격해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전투 경험이 있는 지휘관들은 전투기동 자체가 불가능한 오합지졸들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에섹스는 그 말에 따라 추격하지 않았고, 야포 몇 문이 유효탄 없이 몇 번 국왕군 쪽을 향해 포격하는데 그쳤다. 벌어진 적도 없는 전투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이 전투 아닌 전투의 대치는 매우 크고 극적인 의미를 가졌다. 왕은 기회를 놓쳤고 국왕군은 이후 다시는 런던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런던을 점령할 가능성은 다시는 오지 않았고, 나아가 국왕이 최소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길은 사라졌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루퍼트의 제안대로 엣지힐 직후 기동부대가 런던으로 내달려 기습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국왕이 그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내다보지는 못했지만 터넘 그린은 일종의 분수령이 되었다. 국왕의 군대는 천천히 다시 서쪽으로 행군해 리딩을 거쳐 옥스퍼드로 돌아가 그곳에 자리 잡았다.

이로써 단기결전의 희망은 사라지고,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11월 1일에는 런던 서쪽의 에일즈버리Aylesbury에서 루퍼트 본인이 이끄는 병력 수천명이 에일즈버리를 점거했다가 인근 교각에서 에일즈버리를 탈환하러 온 천명이 채 안되는 수의 의회군과 맞닥뜨려 교전, 큰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제사격에 당해 패주했다, 고 의회군 측 팜플렛이 보도한 바 있다. 여기서 1백여명의 의회군 손실에 비해 국왕군은 그 두 배의 손실을 입었다는 말도 들어가 있다. 1800년대에는 그 문제의 교량 인근에서 250여구에 달하는 인골들이 발굴되었고 그 자리에 전몰자 위령비도 세워졌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에일즈버리에서는 전투가 있었던 적도 없고 루퍼트가 그 근처에 간 적도 없고 1800년대에 발굴되었다는 시신은 중세의 앵글로 색슨 병사들의 시신들이며 에일즈버리 전투 자체가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회가 날조해낸 사건이다, 라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등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새로운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던 덕분에 오늘날 비록 인터넷의 '향토역사' 설명 페이지 등에서 해당 전투가 당당히 실려 있긴 함에도 영국 내전을 다루는 역사서적들에서는 아예 그 전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지난편 '엣지힐 전투' 이후로 반년이나 지나고서 쓰는 그 다음편...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연재 재개입니다

덧글

  • 행인1 2012/12/08 14:23 #

    약탈로 시간 끌지 말고 런던으로 내달렸으면 승자가 어떻게 되건 결판이 났을텐데... 그나저나 런던에 쳐들어 가기도 망설이면서 협상도 안하는 태도는 뭐라고 평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냉동만두 2012/12/08 16:08 # 삭제

    오오오 너무나 기다렸습니다!!!

    왕의 행동은, 멋지긴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불행을 야기했겠네요.
  • 모에시아 총독 2012/12/08 17:24 #

    기다렸습니다!

    뭐 사실 후대의 우리는 결과를 뻔히 아니까 찰스의 결정이 우유부단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 당시 찰스가 엄청나게 고민한 것은 사실이고 저도 거기에 동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시쉐도우 2012/12/08 22:40 #

    역시 싸움이란 일단 승기를 잡았으면 그대로 밀어붙여야 되는 건가봅니다.
    모메시아 님의 해석이 맞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영국 왕당파 입장으로선 뼈아픈 실책....이 되었으니까요.
  • 셔먼 2012/12/09 01:43 #

    찰스 1세는 이전까지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않았던 국왕이라 그런지 엣지힐 전투에서 멘붕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은 런던 점령의 큰 기회를 빼앗기고야 말았군요.;
  • 누군가의친구 2012/12/09 20:48 #

    결단력 부족도 그렇고 약탈허용은 최악이군요. 하긴 약탈이 관행인 면도 있지만 명분을 중시한다면 허락되어선 안되었습니다.
  • 황제 2012/12/10 10:56 #

    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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