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1642년 말, 런던과 옥스퍼드의 상황

터넘 그린에서 성과 없이 철수한 국왕 찰스의 군대는 리딩을 거쳐 1642년 11월 23일 옥스퍼드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다. 이후 전쟁 기간의 대부분 동안 이 대학도시는 국왕의 궁전이자 국왕파의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Christ Church, Oxford]


본래 옥스퍼드는 그 충성심에 따라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대학 쪽의 학자들이나 학생들, 교직원들은 대부분 국왕에 충성하였고, 옥스퍼드 시내의 일반 시민들은 의회파에 우호적인 편이었기 때문에 내전 발발 전부터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당장 1642년 8월에 노팅엄 성에서 王旗가 휘날릴 때 수백명 규모의 국왕군이 옥스퍼드에 접근하자 도시 내에서 그들의 도시 진입을 막으려는 시민들과, 옥스퍼드 수석 총장Vice-Chancellor of Oxford이 이끄는 국왕 충성파 학자,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일기도 했다.

국왕군이 도시에 진입했다가 다시 국왕군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길을 떠난 후에는 세이 앤 질 남작Baron Saye-and-Sele 윌리엄 파인즈가 이끄는 의회군이 진주했다. 옥스퍼드셔 일대를 의회의 통제 하에 넣으려 했던 세이 앤 질 남작은 사비를 들여 연대를 창설하고 옥스퍼드도 접수하러 온 것으로, 그들은 수석 총장과 옥스퍼드 시장을 감금하고 대학 안의 제단과 성화, 성상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세이 앤 질 남작 윌리엄 파인즈의 방계 후손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배우이자 영화감독 랄프 파인즈다) 케임브릿지처럼 옥스퍼드도 약탈당하고 '우상파괴Iconoclast'의 무자비한 폭력에 문화재들이 위험에 처했다.

이것을 막은 것은 당시 42년 째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 에 재직하고 있던 총장 랄프 케틀 박사였다. 당시 79세였던 케틀 박사는 노구를 이끌고 세이 앤 질 남작 앞에 서서 대학 내에 걸려있는 미술품들에 대해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냥 낡은 장식품이고 우리들은 저걸 그냥 설거지 행주쯤으로 취급한답니다"고 이야기하며 설득했고 그 결과 옥스퍼드의 미술품들은 몇몇 성모상들을 제외하면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다 총을 쏴 부순 병사도 있었고 아기예수의 목을 잘라낸 병사도 있었다) 무사히 보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미술품들이 보호되긴 했어도 세이 앤 질 남작의 의회군은 그 외에 도시 내에서 무질서하게 행패를 부리며 학자들과 시민들을 괴롭혔고, 이들이 에섹스 백작의 의회군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떠났을 때 옥스퍼드의 민심은 확실히 국왕편에 기울게 되었다. 국왕군이 도시에 진주할 때 많은 시민들이 성문 옆으로 늘어서서 환호했고 루퍼트 대공의 지시 하에 도시 방어진지 구축 작업이 이뤄질 땐 다들 적극적으로 자원해 공사를 도왔다. 물론, 오래지 않아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그들은 국왕군에 대해서도 정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찰스 왕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대학의 대강당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해리 포터'에서 호그와츠의 대식당으로 나온 곳이다) 곧 다른 대학들도 전부 왕의 대신들, 왕을 따른 '옥스퍼드 의회' 의원들, 군인들 등의 거처로 변모했고 조용하던 대학도시는 군사 요새도시이자 행정 중심지가 되어 북적이게 되었다. 왕의 추밀원Privy Council은 오리엘 대학Oriel College, Oxford에서 모여 회의를 했고 얼 소울즈 대학All Souls College은 화약과 탄약을 제조하는 병기창이 되었으며 오늘날 오스터 대학의 글로스터 홀Glocester Hall은 검을 제련하는 대장간이 되었다. 오늘날 브레즈노즈 칼리지 자리의 프레윈 홀Frewin Hall은 탄약고 역할을 했다. 또한 도시 내 거의 모든 건물들은 병사들이 기거하는 병영이 되었다. 도시 전체는 루퍼트 대공의 적극적인 감독 하에 참호와 방어벽과 포대로 둘러싸인 요새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처음에는 자진해서, 나중에는 강제로 공사에 동원되고 또한 막대한 양의 전쟁자금을 왕을 위해 지불해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옥스퍼드로 따라가 수십점 초상화들을 바삐 그려야 했던 왕실화가 윌리엄 돕슨의 찰스 1세 초상. 1643년.]



그렇게 변화한 이 대학 도시 안에서 귀족들이나 하급 군인들이나 모두 고상한 학자들의 눈에는 저속하게 비칠 언행으로 분위기를 망치게 되었다. 병사들은 오물을 사방에 남겼고 여인들은 속이 다 비치는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파티에 참석함으로써 학자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시민들과 술 취한 병사들 사이의 싸움도 끊이지 않았고 상류 계층의 사람들도 툭하면 시비가 붙어 거리에서 결투를 벌이려 들었다. 앞서 옥스퍼드 문화재들의 파괴를 막았던 랄프 케틀 총장이 그 이듬해 죽자 사람들이 '박사께서 옥스퍼드가 더럽혀지는 꼴을 보며 괴로워하시지만 않았어도 100세를 채우셨을 것'이라 평한 것에서 그 광경이 충분히 짐작 갈 것이다.


옥스퍼드가 이렇게 변해가기 시작한 1642년 말,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소규모 국지전들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약탈 행위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도처에서 귀신이나 환상 같은 초자연적 심령현상의 관측이 보고되었다. 터넘 그린 이후, 1642~1643 사이의 겨울 동안에는 군사적으로 별로 큰 변화가 일지 않았고, 따라서 양측 협상 입장의 변화도 없었다. 포윅 교橋 전투와 엣지힐 전투는 왕당파의 사기를 드높였고 터넘 그린에서의 대치는 의회측의 사기를 높이긴 했으나 전반적인 균형은 전투 전과 다름없었다.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대승이 필요했으나 어느 쪽도 이를 거두지 못했고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불안한 시민들은 동요하여 평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왕 충성파들이 모인 옥스퍼드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보다 런던에서는 이러한 평화에의 욕구가 훨씬 더 컸다. 체제 변화의 물결이 가장 급격하게 느껴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런던의 의회에서는 파벌이 두 개로 나눠지고 있었다. 이미 9월~10월에 국왕군에 의해 공격받는 셔본 성Sherborne에서 농성하다 부하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한 덴질 홀즈Denzil Holles가 왕과의 무조건적 화평을 논하는 파벌을 이끌었다. 홀즈는 훗날, 자신이 왕과의 빠른 화친을 원하게 된 것은 계속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상태가 결국 사회적 혁명으로 이어져 기존 계급체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인들이 말을 타고 다니게 되고, 가장 흉악한 자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 가장 간악한 자들, 가장 하층의 자들이 권력을 손에 얻자 왕권을 짓밟고 의회를 농락하고 이용하려 들었으며, 법을 어기고, 이 땅의 귀족과 젠트리들을 파괴하거나 제압하려 들었다.” 이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으나 실제로 의회측에서도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많았다.

그런 기조로 인해 1642년 10월 29일 (엣지힐 전투 일주일 후) 귀족원이 하원에 국왕과 재협상을 하도록 제안했고, 각 계층으로부터의 압박 때문에 하원도 11월 2일에 동의했던 것이었다. 왕은 평화 협상에 진지하게 응하지 않았고 의회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왕이 버밍엄, 나아가 브렌트포드로 진격해 런던 바로 코 앞까지 도달해 터넘 그린에서 대치하던 상황에 이르러서조차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런던에서 드높았다.


[The Parliament]



런던의 하층민들, 도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런 기조가 만연해 있었다. 사실 런던은 비록 의회의 본거지이긴 했어도 여전히 왕가에 충성하겠다는 사람들이 전쟁 기간 내내 많이 남아 있었다. 허나 이 1642년 말에 중-하층의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을 것이다. 당대 주요 산업이던 섬유 산업과 무역이 전쟁으로 인해 조각나 (내륙의 섬유공장에서 육로를 통해 도시와 항구로 실어나르던 것이 불가능해지자)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물가상승으로 인해 일반인들이 고통받았다. 그 주변의 마을들이 군대에 의해 직접적으로 입는 피해가 막심했던건 물론이었다. 무엇보다도 의회가 전쟁을 위해 증세를 강행한 것이 영향을 끼쳤다. 11월 29일에 하원은 법령을 통해 작위적으로 징세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징수될 세금은 찰스 1세가 과거 추진했고 커다란 반발을 샀었던 '건함세Ship money'보다 더 무거운 액수였는데다가 건함세와는 달리 법적 근거조차 전무했기에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클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였으면 모르나, 의회가 9월에는 모든 종류의 연극 공연을 금지시키고 12월 12일에는 도박과 베어 베이팅Bear Bating-곰을 묶어놓고 괴롭히는, 당시 유행한 놀이-을 비롯한 유흥활동을 금지시키며 사람들에게서 여흥거리마저 뺏어가자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입은 고통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의회에 호소하는 청원서. 1642년 11월 27일.]



이런 상황에서 12월 8일에 의회의 군수 문제와 예산관리가 이뤄지고 있던 런던 해버대셔 홀 앞에 상당한 군중이 모여 반反 의회 적 집회를 가졌고 그 나흘 후에는 런던 시청에 큰 군중이 몰아닥쳐 회의를 방해하며 평화를 외쳤다. 기록되기로는 어떤 이가 'Truth And Peace!진실과 평화!'라는 구호를 외치자 다른 이들이 'Hang Truth! We want peace at any price!진실 따위 개나 줘버려! 우린 무슨 대가를 치르든 평화를 원한다!'고 답했다는 데서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폭력사태도 벌어졌고 런던 시 민병대가 도착해 군중을 해산하려 하면서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시민들에 의한 평화 협상 청원서가 12월 17일, 19일, 22일에 연거푸 제출되었다. 이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에는 단순히 일반 시민들 뿐 아니라 상당한 재력가 상인들과 변호사들, 그리고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성직자와 고위직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월 5일에는 코벤트 가든에 수만의 군중이 모여 의회가 당장 평화협상을 재개하지 않는다면 그 일대의 집들을 죄다 약탈할 것이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제출한 청원서는 2만여명이 서명했다고 한다.

이렇게 흉흉한 상태에서 1월 1일 새벽 3시~4시에는 런던과 옥스퍼드 사이 지역 일대에서 "하늘에서 나타난 혼령같은 형상들이 무수하게 나타나 서로 말을 타고 돌격하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목격되었으며 동시에 "화포 소리와 칼 부딫는 소리, 비명과 신음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져"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와 모습이 일다가 동 틀 무렵에 끝났"다고 하여, 많은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집 깊숙히 숨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다.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아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이 현상은 수많은 목격자와 경험자들의 증언과 함께 널리 퍼졌고 찰스 1세도 의회도 각자 조사단을 파견해 이 현상에 대해 알아보게 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나왔고 양측은 이것이 각자의 승기와 하느님의 간택을 보여주는 징조라고 주장하는 팜플렛을 발간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것이 하느님이 '기독교인들이 서로의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광경에 분노하셔' 보여준 징조라 믿으며 따라올 징벌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너무나 멀었고, 한 겨울에 접어들고 있는 이 때에도 옥스퍼드와 런던을 떠나 전국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전략기동이, 기습이, 전투가, 포위공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00. 영국 내전사의 사관변천
01. 왕의 초상
02. 제임스 1세의 치세와 변화하는 영국의 상황
03. 신학적 입장차? 성공회를 둘러싼 문제
04. 찰스 1세의 개인 통치기와 스코틀랜드 반란
05. 스트라포드의 처형과 갈등의 심화
06. 노팅엄 성에 휘날리는 왕기王旗
07. For King, or Country? 충성의 문제
08. 모병, 거병, 용병
09. 전초 상황 종합 정리
10. 내전기 옥스퍼드와 캐임브릿지의 엇갈린 운명
11. 양군 출진, 에섹스와 루퍼트
12. 엣지힐 전투
13. 런던 진공
14. 1642년 말, 런던과 옥스퍼드의 상황

덧글

  • 냉동만두 2012/12/28 13:16 # 삭제

    기다렸습니다!!

    내전이라 그런지, 서로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소심하게 움직이는군요.
  • Allenait 2012/12/28 14:11 #

    아무래도 내전이라 그런지 대담하게 움직이지는 않는군요
  • 마무리불패신화 2012/12/28 21:01 #

    이 글만 보면, 의회파가 이긴게 신기할 정도네요. 크롬웰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봅니다. ㄷㄷㄷ
  • 유리멘탈 2012/12/28 22:51 #

    역시 옛날 군인들이란...-_-;;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행패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2/12/29 08:13 #

    지금도 여러가지 이유로 문화재나 유물등이 파괴되는 모습이 오버랩되는군요. Aㅏ...
  • 행인1 2012/12/29 10:38 #

    아직은 왕과 의회 모두 미적거리는 상황에서 사회 변화를 두려워하는 모습도 있고 1년도 안되었는데 못살겠다며 어서 평화를 내놓으라며 재촉하는 모습도 봉고 난리군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삼왕국 전쟁사 또는 단순히, 영국 내전사

7년전쟁 북미전역

말보로 공작의 일생

로열 네이비 이야기

이베리아 반도전쟁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영국육군 블랙왓치 부대史


통계 위젯 (화이트)

37153
973
4703596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1420

I Support ROKN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아지캉 최고

9mm Parabellum Bullet

the pill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