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웨스트 컨트리의 초전



7월 말, 그러니까 8월 22일에 노팅엄 성에서 국왕이 친정기를 세우기도 전에, 허트포드 후작Marquis of Hertford은 국왕의 인가를 받아 웨스트 컨트리West country, 즉, 콘월Cornwall, 데본Devon, 도셋Dorset, 햄프셔Hampshire, 서머셋Somerset, 윌트셔Wiltshire 6개 카운티를 총괄하는 장군의 직위에 올라 서머셋의 바스Bath에 도착했다. 웨스트 컨트리로 통칭되는 이 잉글랜드의 남서부 지방에는 남쪽으로는 포츠머스가, 동쪽으로는 바스 등 주요 도시들이 위치해 있고 무엇보다도 브리튼 서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브리스톨Bristol이 위치해 있었다. 이 브리스톨을 장악하는 것은 장기전으로 갈 경우 국왕군에 있어서 필수적인 목표였기에, 의회파로 성향이 기울고 있던 이 지역의 공략은 중대한 과제였다.

허트포드 백작의 임무는 이 웨스트 컨트리에서 왕의 군대를 모집해 거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병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지역 대부분의 주민들이 의회 쪽으로 민심이 기울어 있었고 중립적이었던 곳에서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역 상설 민병대들은 모집 명령에 응해 모이긴 했으나 자신들은 자기들 지역만을 지킬 분 절대로 그 밖으로 나가지 않겠으며 국왕이나 의회 어느 쪽과도 싸우지 않을 것을 천명했다. 간신히 보병 240명과 기병 150여명 정도를 모집하는데 성공한게 전부였다. 그 후 며칠 간 곳곳에서 모인 병력은 1천명이 간신히 되었다. 이제 이들은 국왕군 지지선언을 한 남쪽의 항구도시 포츠머스를 포위로부터 구해낼 예정이었다.

반면 의회 측에 의해 같은 지방에 파견된 알렉산더 포펌 경Sir Alexander Popham은 상황이 훨씬 나았다. 8월 1일 서머셋의 솁튼 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의회를 위해 싸울 120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국왕군 측의 랄프 홉튼 경Sir Ralph Hoton이 이를 어찌 방해해 보고자 몇 명의 기병들을 데리고 그곳에 나타났으나 사람 수만 세어보고 그대로 빠져나왔다. 사흘 후인 8월 4일에는 이 의회군의 일부가 인근에서 국왕군 순찰대와 마주쳐 사소한 교전을 벌였고 소수임에도 길게 정렬해 허세를 부린 국왕군이 수배의 의회군을 퇴각시킨 국왕군이 대대적 승전을 선언했다. 이 ‘승전’이 별 의미가 없었다는 것은 그 다음날 포펌 경의 본대가 전진하자 국왕군이 당장 멀리 셔본Sherborne으로 후퇴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났다.

그 이후 셔본 성 주위에서 일진일퇴가 거듭되며 시간이 흐르다 9월 2일에 런던에서 웨스트 컨트리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베드포드 백작Earl of Bedford을 파견해 그의 지휘아래 웨스트 컨트리 전역에서 모집한 7천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 숫자에 놀란 허트포드의 국왕군은 셔본 성에 틀어박혀 장기 농성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베드포드는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움직이다가 동쪽의 마을 요우빌Yeovil 방면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베드포드와는 달리 국왕군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셔본 성에서 나와 셔본 마을을 재점거해 방어하고, 더 나아가 허트포드가 휘하의 랄프 홉튼 경에게 100기의 기병과 60명의 드라군(승마보병), 그리고 200명의 보병을 맡겨 후퇴하는 베드포드의 의회군을 추격해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이는 단순한 강행정찰 임무였으나, 요우빌 앞 ‘바빌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언덕에서 홉튼의 부대는 주의를 소홀히 해 측면에서 나타난 의회군과 뜻하지 않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9월 6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홉튼은 보병대를 먼저 후퇴시키고 기병들로 이를 엄호하며 기병 돌격을 이끌었다. 결국 혼란 속에서 국왕군은 패주했지만 홉튼의 빠른 대처와 의회군의 소극성 덕에 서른 명도 채 안 되는 피해만 입고 복귀할 수 있었다.

[베드포드 백작]


베드포드 백작은 이 바빌론 힐Babylon Hill의 교전에서의 작은 승리에 그다지 고무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후방인 도체스터Dorchester 방면으로 물러났다. 그의 소극성은 아마 그가 의회 내 평화파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군으로의 변절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1643년 여름에 평화협상을 주도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갔다가 편을 바꿔 국왕군에 가담해 수개월간 참전하다가, 변절자란 점 때문에 신뢰를 얻지 못해 주요 직책을 맡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다시 의회로 돌아갔다. 의회도 그가 변절했다고 의심해 신용하지 않아 그의 정치인생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편 셔본의 국왕군은 9월 18일에 그들이 원래 목표로 했던 포츠머스가 이미 윌리엄 월러 경Sir William Waller이 이끄는 의회군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기가 떨어지고 의욕을 상실했다. 이에 허트포드 백작은 휘하 병력을 전부 이끌고 작은 항구인 마인헤드Minehead로 가 그곳에서 배를 구해 브리스톨 해협을 건너 웨일즈를 통해 국왕군 본대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배가 겨우 두 척밖에 없었다. 대포와 보병대를 실을 공간은 있었지만, 기병들까지 태울 자리가 없어 기병대는 남겨져야만 했다. 베드포드의 의회군이 비록 소극적임에도 천천히 추격을 해오고 있는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이 허트포드와 그 부대는 그대로 배를 타고 떠났으며, 랄프 홉튼은 그들과 작별하고 겨우 16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9월 25일에 서쪽 콘월로 떠났다. 베드포드는 이 한줌의 왕당파들을 쫒지 않고 엣지힐 전역에 참전하기 위해 동쪽의 에섹스 백작이 이끄는 의회군 본대와 합류하러 떠났다.


[랄프 홉튼 경]



콘월로 떠난 랄프 홉튼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1596년 서머셋 카운티의 위섬Witham의 부유한 젠트리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링컨 칼리지에서 수학하던 그는 1620년에 보헤미아에서 카톨릭군과 싸우던 신교군에 참가하러 떠나 종군했다. 1624년에는 팔츠에 파견된 영국군 보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하는 등 전쟁 경험을 쌓았다. 본국에서는 서머셋의 지역구들에서 연이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국왕 찰스 1세의 즉위 때는 기사 작위도 받았고 대륙에서의 종군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국왕의 근위 기병대Life Guard에서도 대위로 복무했다.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시작되었을 때는 국왕의 신임을 받는 점을 들어 대간주Grand Remonstrance를 왕에게 전달하는 임무도 맡았었다. 그는 의회측 입장에 동조하였으며 스트라포드의 탄핵에도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전형적인 하원의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왕의 충신이었다. 그는 1642년 1월에 국왕에 대한 의회측의 비방에 격분하여 항의하다가 불순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런던 타워에 2주간 수감되었고 출소하자마자 왕에게 달려갔다. 그 후 수년간 홉튼은 전장에서 활약하여, 내전기 국왕군에서 가장 뛰어나고, 또 가장 명성을 휘날린 지휘관 중 하나가 되었다.


랄프 홉튼과 그의 160기 기병들이 10월 초 콘월로 진입했을 때 콘월은 아직 정세를 살피며 중립을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홉튼이 콘월의 보드민Bodmin에서 모병을 했을 때 나타난건 겨우 18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트루로Truro의 콘월 지방의회가 그를 소환해 무장병력을 이끌고 콘월에 진입한 죄를 물으려 했다. 홉튼은 자원해 재판정에 서서 정의롭고 합법적인 것은 의회가 아닌 국왕이며, 그 국왕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고 열변을 토해 의회를 설득했다. 정말로, 콘월 의회는 중립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홉튼을 무죄판결 했을 뿐만 아니라 콘월을 구원해주러 온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표했고, 더 나아가 리처드 버틀러 등의 의회로부터 파견된 지방관리 위원회를 당장 추방해버렸으며, 3천여명의 콘월 지역민병대가 소집되어 홉튼의 지휘를 받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콘월 지방이 국왕측에 접수되었다.




이 때 콘월 지역 민병대는 콘월 밖으로 나가는 것은 거부했고, 그러자 홉튼은 민병대를 돌려보내고 다시 자원병력을 구성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모병에 나섰다. 그러자 지역 왕당파 젠트리 지도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이후 명성을 떨치게 되는 5개 콘월인 보병 연대Cornish Regiments of Foot 3천여명과 5백기의 기병들이 모집되었다. 이제 상당한 병력을 이끌게 된 홉튼은 11월이 되자 콘월 경계를 넘어 데본 서쪽 끝에 있는 플리머스 항구를 노려보게 되었다. 콘월 카운티 경계선 지역들의 방어태세를 갖추고 12월 초 플리머스 주변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한 홉튼은 플리머스 의회군의 방어태세가 단단하자 병력을 더 확충하기 위해 데본의 모드버리Modbury에서 자원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은 군인재목이라기 보다는 ‘지역 축제에 모인 마을 주민들’ 수준이었고 무장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틈을 타 의회측 플리머스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루스벤William Ruthven 대령이 5백기의 기병을 이끌고 나와 급습, 모드버리에 모인 사람들을 전부 흩어놓았다. 그리고는 그는 곧바로 플리머스로 돌아가는 대신 홉튼이 다시 그 사람들을 모아 군대로 만들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사로잡은 왕당파 데본 사람들을 남쪽의 다트머스로 내달리게 해 모조리 배에 실어다가 플리머스로 보내버렸다.

홉튼의 플리머스 공략은 이렇게 윌리엄 루스벤과 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용병부대의 기민한 활약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고, 그 대신 더 동쪽으로 데본 깊숙이 자리한 엑세터Exeter를 먼저 공략해 플리머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처음에는 엑세터 앞 거점들을 장악해 통행로를 틀어막고 12월 30일에는 엑세터 시의회에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윌리엄 루스벤이 빠르게 내달려 엑세터와 그 인근의 모든 보병들을 끌어모아 국왕군과 대치했고, 적지 깊숙한 곳에서 보급선이 위태로워져 식량도 탄약도 없는 상태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홉튼은 결국 데본 공략을 포기하고 다시 콘월로 후퇴해야만 했다. 루스벤의 의회군은 이를 바짝 쫓았다.

루스벤은 4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홉튼이 세워놓은 방어선을 빠른 기동으로 뚫어버리고 콘월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고, 1월 6일경 홉튼의 후위대가 루스벤의 전위대와 교전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군을 위기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웨스트 컨트리 전선의 중요성을 파악한 의회가 추가 파견한 스탬포드 백작이 이끄는 수천명의 또다른 의회군이 루스벤과 합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물자도 떨어진 홉튼의 콘월 부대는 좁혀오는 추격군에 대해 최후 항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이변이 일어났다. 콘월 지역을 급습하며 오가던 의회측 사략선 세 척이 갑작스러운 풍랑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펄머스Falmouth 항으로 들어왔고 이 배들이 나포되면서 거기 실린 탄약이 고스란히 국왕군 손에 떨어졌다. 이 물자를 배송받은 홉튼의 부대는 다시 태세를 정비하고, 1월 18일에 그때까지 공식적인 직함이 없던 홉튼은 콘월 군의 사령관으로 공식 추대되어 부대를 추스르고 반격을 준비했다.


루스벤의 의회군은 홉튼의 부대와 숫적으로는 비등했는데 기병이 더 많은 반면 보병은 더 적었다. 다만 아일랜드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정예 스코틀랜드 용병부대는 플리머스 방어를 위해 후방에 남겨지고 그가 데려온 병력은 대부분 신병들이었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 군대와 홉튼의 콘월 부대는 1643년 1월 19일 보코녹Boconnoc이란 마을 앞의 브래독 다운Braddock Down이라는 언덕 구릉들에 포진하여 대치한다. 의회군 4천여명과 국왕군 5천여명의 싸움이었다.




1월 19일에 벌어진 브래독 다운 전투에서 홉튼은 2문의 야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숨겨둔 채 두 시간 동안 장거리 머스킷 사격전만을 벌였다. 루스벤은 여기서 스탬포드의 지원병력과 합류하는 것을 기다릴 수도 있었으나 그때까지의 선전으로 인해 자신감이 붙은 나머지 진격을 명령했다. 이 때 홉튼은 그때까지 숨겨두고 있던 야포들을 끌어내 의회군 보병진에 포격을 가했고, 여기에 놀라 패닉에 빠진 그들을 향해 전진하며 사격을 퍼부었다. 의회군 보병들은 단 한 차례의 일제사격만을 (그것도 황망한 일제사격이라 홉튼 측에 별 피해도 입히지 못한) 가하고선 등을 돌려 무너져 패주했고, 의회군 기병들은 보병들의 혼란을 보고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때맞춰 돌격해온 홉튼의 기병대에게 또한 패주했다. 뿐만 아니라 이 의회군의 후퇴로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새삼 국왕 지지를 선언하며 봉기해 퇴로도 차단했다. 콘월인들은 빠르게 전진해 많은 포로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루스벤 본인과 그의 장교들만이 간신히 빠져나와 도망갔으며 그의 병력은 산산히 흩어졌다.

브래독 다운 전투Battle of Braddock Down에서 4천명에 달하던 의회군은 약 3백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1250명이 홉튼에게 포로로 잡혔다. 콘월에서, 더 나아가 웨스트 컨트리의 전세가 극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의회파 손아귀에 확고히 장악되어있을 것 같았던 웨스트 컨트리는, 이후 1643년 내내 콘월과 데본을 통해 브리스톨과 킹스로드를 둘러싼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국왕군은 홉튼의 활약에 고무되어 이 지역에 증원병력을 급파했고, 의회군도 국왕군이 웨스트 컨트리, 나아가 브리스톨을 장악하는 경우의 사태 심각성을 인지하고 그곳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덕분이었다.

물론, 웨스트 컨트리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전역이 열렸다.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00. 영국 내전사의 사관변천
01. 왕의 초상
02. 제임스 1세의 치세와 변화하는 영국의 상황
03. 신학적 입장차? 성공회를 둘러싼 문제
04. 찰스 1세의 개인 통치기와 스코틀랜드 반란
05. 스트라포드의 처형과 갈등의 심화
06. 노팅엄 성에 휘날리는 왕기王旗
07. For King, or Country? 충성의 문제
08. 모병, 거병, 용병
09. 전초 상황 종합 정리
10. 내전기 옥스퍼드와 캐임브릿지의 엇갈린 운명
11. 양군 출진, 에섹스와 루퍼트
12. 엣지힐 전투
13. 런던 진공
14. 1642년 말, 런던과 옥스퍼드의 상황
15. 영국 내전사 - 웨스트 컨트리의 초전

덧글

  • 2013/01/22 11:5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13/01/22 13:03 #

    글쎄요, 영국 내전기 드라군은 말을 오로지 지역에서 지역으로 이동할 때만 사용하고 전적으로 보병으로 운용되는 병종이었습니다. 따라서 18세기의 드라군-'용기병'과 같다고 볼 수가 없고, 승마보병이라해도 이상할 건 없지요. 기계화 보병도 장갑차를 타고 전장으로 이동은 하지만 보병 부대지 장갑차 부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 2013/01/22 13:1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월광토끼 2013/01/22 19:21 #

    내전기 보병은 파이크병과 머스킷병 두 병종으로만 나뉘어집니다. 보병연대Regiment of Foot는 파이크병과 일정 비율의 머스킷병들로 구성되는데, 승마보병들은 일반적인 머스킷을 사용하는 머스킷 보병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상 사격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으며 마상 근접무기도 없었습니다. 고급 승마술을 훈련받지도 않았고 단기간의 간단한 승마 훈련만을 받고 투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장에 이동해 위치를 선점한 후 말에서 내려, 일반 보병 연대보다 더 느슨한 진열로 배치되어 사격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타는 말은 조랑말 등 군마로는 부적합한 말들로 순수히 이동수단으로만 쓰였습니다. 영국 내전기 드라군의 운용방식은 따라서 18세기의 경보병Light Foot과 상당히 유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병과 승마보병의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병은 마상 총검술을 고도로 훈련받고 기병도를 휘두르며 대개 피스톨을 사용해 싸웠습니다. 때때로 기병총 카빈Carbine을 쓰기도 했지요. 중요한 것은 이들은 전투에서 육중한 군마를 타고 돌격하는 충격부대로 싸웠다는 점입니다. 드라군은 따라서 절대로 기병과 같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모병, 거병, 용병>http://kalnaf.egloos.com/3294273 에 짧게나마 기술한 바 있습니다.
  • 행인1 2013/01/22 16:13 #

    점점 내전이 전국으로 퍼지는군요.
  • 냉동만두 2013/01/23 07:36 # 삭제

    흥미진진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군요
  • 유리멘탈 2013/01/23 09:10 #

    세치혀의 힘이 잘 드러나네요. 불리했던 여건을 극복하고 모병에도 성공하고 지휘능력까지 뛰어나 결국 그 상황에서 저 정도까지;;

    운도 따라주고 상대의 오판도 있었다지만 정말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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