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에서의 신형군의 의미와 비중




영국 내전에 대해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주장이며 또 널리 퍼져나가 흔히 얘기되어지는 주장으로, 의회파의 승리가 크롬웰이 이끄는 신형군New Model Army의 창설과 운용 덕택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기정 사실처럼 받아들인 서술도 옛날에는 흔했다. 오합지졸 국왕군과는 달리 크롬웰의 엄정한 훈련으로 탄생한, 프로 직업군인 부대, 영국 육군의 바탕이 된 군대, 내전을 의회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 군대! 하지만 이도 어디까지나 '옛날'에 그랬다는 얘기. 시간이 흐를수록, 학계에서 논의가 오갈수록 신형군이 가진 특별함과 비중은 재평가되어나갔다.

신형군은 1645년 1월 왕과의 마지막 협상 ('욱스브리지 회담')이 결렬되자 2월 17일에 군제 개혁안이 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만들어졌다. 현직 군사령관들이던 맨체스터 백작, 에섹스 백작 등이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의원들은 급진파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크롬웰도 해직되기를 바랬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맨체스터, 에섹스, 월러가 이끌던 군대들을 통합해 600명 규모의 기병연대가 10개, 1200명 규모의 보병연대가 12개, 그리고 1000명의 드라군 1개 연대로 구성된 총 2만 1천여명의 집단군이 편성된 것이다. 이 사령관은 그간 많은 전공을 세운 토머스 페어팩스 경Sir Thomas Fairfax이 맡게 되었고 그 부사령관으로는 필립 스키폰Philip Skippon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신형군'은 의회군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었고 의회군 전체가 재편성된 것도 아니었으며 무언가 획기적으로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징집병을 쓰지 않고 자원병을 모집해 구성했다? 원래 신형군의 뼈대가 된 기존 맨체스터 백작 휘하 동부집단군Eastern Association이 징집병보단 자원병을 선호하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신형군에는 징집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젠틀맨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닌 사람보단 붉은 코트를 걸쳤고 자기 임무를 잘 아는 장교를 선호한다'는 크롬웰의 유명한 말처럼 출신이 아닌 실력만으로 장교단을 구성했다는 것도 어폐가 있다. 이미 동부집단군 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의회파 군대들에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진급한 장교들이 많이 있었으며 반대로 신형군에는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출신 만으로 지휘권을 잡은 장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형군의 주요 의미를 그 이전까지의 지방 중심의, 해당 지역에만 안주하려는 해당 지역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고 해당 지역 인사거나 지역에 연줄이 많은 사람이 지휘권을 가지던 내전기 영국의 군대 특성의 탈피에서 찾는 시도도 있었는데, 신형군이라고 해서 '지방색'이 크게 옅어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타 모든 의회파 군대가 그랬듯, 현장 지휘관과 수도 런던의 위원회로 양분된 지휘권으로 인해 생기는 마찰과 모호성은 신형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형군이 그 이전까지의, 또는 동시기의 다른 내전기 영국의 군 집단들과는 특출나게 달라지는 점은 바로 예산이었다. 의회는 찰스 1세가 내전 이전에 쓰던 징세법 등을 더욱 강화해서 강도높은 세금을 물렸고 국왕파는 '자원봉사' '기부' 등의 이름으로 재화를 거둬갔다. 양측 모두 이렇게 긁어 모으는 돈은 전쟁 초기부터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예산이 부족했다. 왜인가? 지방에서 수거된 재화의 거의 대부분은 바로 그 지방 단계에서 다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지방 정부가 걷은 돈은 다시 지방에서 군사비 행정비 등으로 다 지출되었고 중앙으로 올라가는 양은 미미했던 것이다. 덕분에 국왕군이건 의회군이건 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싸우거나 굶고 지냈기에 쉽게 탈영하고 쉽게 무너지는 문제점은 만연해 있었다.

그런데 1645년 3월 시행된 국왕파 재산 몰수 법은 이전과는 달리 관리감독을 통해 몰수된 재산이 지역에서 소모되는 것을 막고 전부 중앙의, 런던의 골드스미스 홀Goldsmith's Hall로 직접 전달되도록 하였고, 이는 신형군이라는 거대 집단군에 지출될 예산을 확충할 수 있게끔 하였다. 물론 누수는 어디엔가 있기 마련이었고 신형군도 의회가 지정된 월급을 지불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동시기 영국 뿐 아니라 다른 곳의 군대와도 비교해서 신형군은 봉급을 굉장히 잘, 정기적으로 지급받은 편에 속했다. 영국 남서 지방에서 무장중립을 선언하고 '의회건 왕이건 우리 알 바 아니고 그저 우리 재산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는 이념으로 생겨났던 클럽멘Clubmen들이 1645년 여름에 신형군이 진주했을 때 이를 환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왜인가? 이는 신형군이 식량과 침소를 사용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이념적 순수성, 또는 종교적 열망, 고강도의 훈련, 무기 등의 문제 이전에 신형군이 우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돈에 있었다. 봉급을 제때 지불받는 병사들은 그렇지 못한 병사들보다 더 잘 싸운다는 문제였다.

이 외에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숫자에 있다. 2만이 넘는 이 집단군의 승전 기록들에서 국왕군을 결정적으로 끝장내었다는 내스비Naseby 전투, 사실상 1차 영국 내전의 최종 결전에서의 병력비는 흥미롭다. 내스비에서 신형군에 맞선 국왕군은 7천 5백명. 신형군은 1만 4천이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또 그럴 때 전투를 행한 지휘관의 역량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신형군이 만들어질 때 국왕군의 사정은 사실 매우 좋지 않았다. 전선 붕괴가 가속화 되어가던 시점이었고 왕의 부하들은 서로 큰 불화를 겪고 있었다.

한편 의회군이 전장에 나섰을 때 다른 전선에서도 의회군은 존재했으며 이들도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북부에는 포인츠Poyntz가 이끄는 집단군이 있었고 서부에는 매시Massey가 이끄는 집단군이 있었다.
신형군만이 유일한 의회의 군대는 아니었으며 크롬웰만이 유일의 장수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신형군의 존재는 기존에 생각되었던 것처럼 그다지 획기적이지도, 특별하게 특출나지도 않았다. 이들은 변화한 상황 속에서 적절하게 운용된 군대였지, 그들을 상대한, 또는 그들 이전에 존재했던 다른 군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세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형군에 집중하는 동안 지나쳐 버린 내전기의 요소들이 나무나 많았다. 지난 수십년간 학계는 이를 바로잡는 연구성과들을 배출해오고 있다. 신형군이 의회파 승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렇듯, 흔히 말해지는 '비등하던 전쟁에서 군제개혁을 통해 강군을 만든 의회가 이겼다!'는 영국 내전사의 단순 요약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다.

덧글

  • 행인1 2013/03/14 10:06 #

    크롬웰이 만든 신형군의 의미해석 변화가 이렇다는건 알겠는데 이전에는 그걸 '영국 육군의 바탕'으로 가지 인식했던 건가요?(아예 틀린말은 아닌것 같기도 한데...)
  • 파파라치 2013/03/14 10:35 #

    결국은 돈이군요...
  • Silverfang 2013/03/14 11:11 #

    전 이번 포스팅에서 "최소한의 해야 할 것만 잘해도그 군대는 승리한다."라고 읽었어요. 봉급 못받는 군인. 목숨걸고 싸울 이유는 없지요.
  • 유리멘탈 2013/03/14 11:16 #

    돈을 '제대로 받은' 군대라니 그래도 역시 엄청난 혁신!이긴 하네요(...)

    그래도 저 2만명에게 제대로 돈을 주려면 대체 어느 정도의 재정적 효율성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 G-32호 2013/03/14 11:30 #

    역사 모든 것은 예산이 지배합니다
  • 모에시아 총독 2013/03/14 11:43 #

    이렇게 저는 또 제 판타지 소설에 쓸 소재를 받아갑니다. 잘 먹겠습니다ㅎㅎ
  • 누군가의친구 2013/03/14 20:59 #

    http://pds22.egloos.com/pds/201208/23/33/c0091033_503624e6a121c.jpg

    역시 예산이...(...)

    그러고보니 보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곤 했던 시대니 별수 없군요.
  • 시쉐도우 2013/03/14 22:07 #

    결론은 '예산없는 강군없다!' 라고 해야 할까요? (왠지 인기가 없을 말이 되겠지만요. 세금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어서 말입니다.)
  • 로르카 2013/03/21 03:08 #

    마이클 키슐란스키 경은 여러 의미로 군사적인 측면과 나머지 정치, 사회, 이념적인 문제가 적절하게 결합 되어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이상적인 '역사학의 세부 장르로서의 군史학'의 예제 중 하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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