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토지에 대한 그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독점, 노력없이 얻은 그들의 부와 부의 증가, 사회개혁에 대한 그들의 반동적인 태도, 그들의 정치권력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세습, 그리고 그들의 여유로운 삶의 방식과 기생적인 나태함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의회 개혁 이후에는 자신들 계급과 사회에 있어 최고의 시기가 실질적으로 다 끝났다고 진실로 믿게 된 고관대작 상류층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전쟁이 일어나, 그들에게 자신들을 증명하고 존재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전통적으로 그래왔고 또 그렇게 훈련받아왔으며 또 기질적으로 그러했듯이, 귀족계급은 전사계급이었다. 그들은 말을 탔으며, 여우를 사냥했고, 샷건을 쏘아댔다. 그들은 지도할 줄 알았고, 지휘할 줄 알았으며, 그리고 휘하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법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자신들의 기회, 그들이 급진개혁 세력이 묘사하는 것처럼 사회에 불필요한 반동분자가 아니라 명예로운 십자군과 기사도적 영웅들로 구성된 애국자들의 계급으로서 국가의 명예와 국익을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서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증명해보일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전통적 의무의 수행이 그들에게 있어 예상치 못한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해(1914년)가 채 다 가기 전에, 앵카스터 백작가, 카도간 백작가, 더럼 백작가, 하딘지 자작가, 르콘필드 남작가, 트위데일 후작가, 웰링턴 공작가 모두 상(喪)을 당했다. 에일즈버리 백작, 야보로 백작, 오닐 남작의 장남들이 모두 전사했다. 그 중 오닐 남작의 아들 아서 오닐은 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하원의원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3대 대가문의 상속자들도 모두 최초의 희생자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벌리의 영주, 키네어드의 영주, 킨로스의 영주들이었다. 아톨 공작, 애버콘 공작, 랜즈다운 백작 모두 아들들을 한명씩 잃었다. 1914년이 끝났을 때, 사망자 명단은 여섯 명의 상원 귀족, 열 여섯 명의 준남작들, 상원 귀족들의 아들들 아흔 다섯 명, 준남작들의 아들들 여든 두 명을 포함했다. ]
"For more than thirty years, they had been the object of attack; for their unjustifiable monopoly of the land, for their unearned incomes and their unearned increments, for their reactionary attitudes to social reform, for their anachronistic possession of hereditary political power, and for their leisured lifestyle and parasitic idleness. And in the aftermath of the Parliament Act, there were many grandees and gentry who genuinely believed that the best years for their kind and class were emphatically over. But then came the war, which gave them the supreme opportunity to prove themselves and to justify their existence. By tradition, by training, and by temperament, the aristocracy was the warrior class. They rode horses, hunted foxes, fired shot-guns. They knew how to lead, how to command, and how to look after the men in their charge. Here, then, was their chance - to demonstrate conclusively that they were not the redundant reactionaries of radical propaganda, but the patriotic class of knightly crusaders and chivalric heroes, who would defend the national honour and the national interest in the hour of its greatest trial."
"But it soon became clear that discharging this traditional obligation was going to prove to be unexpectedly costly. Before the year was out, the Ancaster, Cadogan, Durham, Hardinge, Leconfield, Tweeddale, and Wellington families were plunged into mourning. The eldest sons of Lord Aylesford, Lord Yarborough, and Lord O'Neil were killed, the Hon. Arthur O'Neil being the first MP to lose his life in the war. The heirs to three great Scottish houses were also among the earliest victims; the Master of Burleigh, the Master of Kinnaird, and the Master of Kinloss. The Duke of Atholl, the Duke of Abercorn, and Lord Lansdowne each lost a son. (...) By the end of 1914, the death toll included six peers, sixteen baronets, ninety-five sons of peers, and eighty-two sons of baronets. (...)"
---------------------------------------
Cannadine, David. 1990.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aristocracy.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p.73-74
체스터 대성당의 서벽에는 윌튼 백작가의 구성원들인 '올튼 파크의 그레이-이거튼 가문' 출신 열 세 명의 사람들에 대한 기념비가 조각되어 있다. 열세 명 모두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선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다 전사했다. 보편적인 사례는 아니었지만 그 가문의 기념비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 열셋 그레이-이거튼들처럼, 당대 영국의 귀족 계급은 크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큰 희생’이라 함을 상류층만의 오만한 자아도취적 자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진정으로 ‘갈려나간’ 것은 소수의 귀족들이 아닌 수많은 일반 병사들, ‘보통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귀족 계급이 눈물 흘리고 슬퍼했음에도 실제 참전했던 귀족들의 80% 가까이는 가족들에게 생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숫자의 비교와는 달리 이 퍼센티지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참전한 이들의 1/5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급의 1차대전 참전 전사비는 1/8이었다. 또한 그 귀족들은 뒤에서 지휘만 하는 고급 지휘관이 아닌, 절대 다수가 개전 당시 일선에서 복무하는 직업군인이었거나 또는 입대하자마자 초급장교로 최전선에 배치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낮은 사회계급의 사람들과 같은 곳, 같은 환경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총알과 포탄을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전쟁을 치렀다. “We have been unlucky in losing rather a lot of officers in proportion to the men." [우리는 병사들보다 장교들을 오히려 더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불운했다] -솜므 전투에 대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평한 이 말에서처럼, 1차대전의 영국 장교들 -귀족들-의 사례는 상당히 유별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영국의 이 귀족들이 1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전장으로 앞 다투어 달려 나간 모습을 단순히 아름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발현 또는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 같은 수사로만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은 명예욕에 굶주려 있었고, 대부분의 젊은 귀족 자제들은 평화의 시대가 너무 오랬던 나머지 전쟁에 대한 잘못된 환상 -전쟁이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 찬 신나는 모험일 것이라는 식의-을 가진 채 가벼운 마음으로 군에 자원했다. 또한 이들은 데이빗 카나딘 경의 분석처럼, 18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의 요구와 귀족계급 특권에 대한 일반 사회의 비난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계급체계에 대한 반동으로 전쟁에 나선 것이기도 했다. 점점 더 일부 특권층이 민중 참여 없이 독단적으로 이끄는 정부가 아닌, 일반 대중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어야만 하는 현대 민주정치체제로 변해가는 영국 정계의 세태로 인해 위축되어가며 몸부림치던 기득권층이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자기합리화, 자아증명이자 구원의 기회로 여기며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비록 자신들이 예상하거나 원했던 방향대로가 아니었음에도 큰 희생 -일선에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후방에서는 자신들의 대저택을 병원과 요양원으로 내어주며-을 치르면서 영국이라는 국가에 봉사했다. 그 모습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그들을 진보개혁의 가장 큰 적 또는 개혁의 대상으로 비판해왔던 이들조차 그 희생을 인정하고 애도하게 만들었다. 1880년대부터의 30년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고귀한 봉사를 행하는 모범적 지도층으로 쇄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노블레스 오블리지’하면 1차대전의 영국 귀족들을 꼭 들먹이게 되는 것으로 그 여파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영국의 귀족계급이 그렇게 인정받고자 하며 뛰어들어, 인정받게 된 이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그들에게 있어 종말과 몰락을 앞당긴 사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촉망받는 젊고 뛰어난 인재들이 진창 속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계급에는 아직 많은 이들과 그들의 영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귀족계급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고고한 이미지를 보통 사람들과 진창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어울리며, 또는 그 내밀한 삶의 공간을 병자들과 부상자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스스로 무너뜨리게 되었다. 귀족 여성들 또한 전장에 나선 남성들에 못지않게 간호사로서 환자들의 수발을 들고 지휘체계 아래에 놓여 명령 받고 움직이며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잡역들을 몸소 해내면서 다른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섞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 내에서의 귀족 계급에 대한 이미지는 좋아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이상 특별한 가치나 위치를 지닌 것으로 인지되지 않게 되었으며, 귀족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전처럼 크게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단순히 이미지의 변화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전쟁을 치르고 봉사를 하느라 재산을 잃은 문제 이외에, 감정적인 피로의 누적도 심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이 때문에 ‘희생’을 경험하지 않은 가문은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스스로가 무사했더라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죽은 경험이 없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기에 이는 계급적 자의식,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낙관 등에 큰 악영향을 끼쳤고 염세적인 태도가 번져나갔다. 염세적 미래관이나 현재인식은 단순히 귀족이나 영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1차세계대전 세대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그것에 대한 자각과 계급적 생존의 문제는 영국 귀족들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는 그보다 30년 전부터 계속 이어지던 귀족 계층의 쇠퇴와 붕괴의 과정과 합쳐지고 그를 가속화시켰다.
전쟁 당시 영국 자유당 정치인이자 상류 지주층 출신이었던 찰스 거니 마스터만의 1922년 저서 England After the War [戰後의 영국]에서는 1차대전에 있어서의 British Aristocracy에 대해 이렇게 썼다.
"In the retreat from Mons, and the first battle of Ypres, perished the flower of the British aristocracy... In the useless slaughter of the Grenadiers on the Somme, or of the Rifle Brigade in Hooge Wood, half the great families of England, heirs of large estates and wealth, perished... in courage and high effort, and an epic of heroic sacrifice, which will be remembered so long as Englad endures."
[몽스의 대 후퇴에서, 제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 귀족계급의 꽃들이 졌다. 솜므에서 무용(無用)하게 살육당한 척탄병 연대에서, 후지 숲의 라이플 여단에서, 영국 대 가문들의 절반이, 거대한 영지와 부의 상속자들이 스러지면서 보여준 용기와 가상한 노력과 영웅적 희생의 서사시는 영국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되게 된 것이 사실이었지만 마스터만의 말대로 영국의 귀족 계급은 다소 무의미하게 살육 당했고, 또 그럼으로써 사회계층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더 빠르게 몰락해갔다.
그러나 곧 이 전통적 의무의 수행이 그들에게 있어 예상치 못한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해(1914년)가 채 다 가기 전에, 앵카스터 백작가, 카도간 백작가, 더럼 백작가, 하딘지 자작가, 르콘필드 남작가, 트위데일 후작가, 웰링턴 공작가 모두 상(喪)을 당했다. 에일즈버리 백작, 야보로 백작, 오닐 남작의 장남들이 모두 전사했다. 그 중 오닐 남작의 아들 아서 오닐은 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하원의원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3대 대가문의 상속자들도 모두 최초의 희생자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벌리의 영주, 키네어드의 영주, 킨로스의 영주들이었다. 아톨 공작, 애버콘 공작, 랜즈다운 백작 모두 아들들을 한명씩 잃었다. 1914년이 끝났을 때, 사망자 명단은 여섯 명의 상원 귀족, 열 여섯 명의 준남작들, 상원 귀족들의 아들들 아흔 다섯 명, 준남작들의 아들들 여든 두 명을 포함했다. ]
"For more than thirty years, they had been the object of attack; for their unjustifiable monopoly of the land, for their unearned incomes and their unearned increments, for their reactionary attitudes to social reform, for their anachronistic possession of hereditary political power, and for their leisured lifestyle and parasitic idleness. And in the aftermath of the Parliament Act, there were many grandees and gentry who genuinely believed that the best years for their kind and class were emphatically over. But then came the war, which gave them the supreme opportunity to prove themselves and to justify their existence. By tradition, by training, and by temperament, the aristocracy was the warrior class. They rode horses, hunted foxes, fired shot-guns. They knew how to lead, how to command, and how to look after the men in their charge. Here, then, was their chance - to demonstrate conclusively that they were not the redundant reactionaries of radical propaganda, but the patriotic class of knightly crusaders and chivalric heroes, who would defend the national honour and the national interest in the hour of its greatest trial."
"But it soon became clear that discharging this traditional obligation was going to prove to be unexpectedly costly. Before the year was out, the Ancaster, Cadogan, Durham, Hardinge, Leconfield, Tweeddale, and Wellington families were plunged into mourning. The eldest sons of Lord Aylesford, Lord Yarborough, and Lord O'Neil were killed, the Hon. Arthur O'Neil being the first MP to lose his life in the war. The heirs to three great Scottish houses were also among the earliest victims; the Master of Burleigh, the Master of Kinnaird, and the Master of Kinloss. The Duke of Atholl, the Duke of Abercorn, and Lord Lansdowne each lost a son. (...) By the end of 1914, the death toll included six peers, sixteen baronets, ninety-five sons of peers, and eighty-two sons of barone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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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nadine, David. 1990.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ritish aristocracy.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p.73-74
체스터 대성당의 서벽에는 윌튼 백작가의 구성원들인 '올튼 파크의 그레이-이거튼 가문' 출신 열 세 명의 사람들에 대한 기념비가 조각되어 있다. 열세 명 모두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선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다 전사했다. 보편적인 사례는 아니었지만 그 가문의 기념비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 열셋 그레이-이거튼들처럼, 당대 영국의 귀족 계급은 크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큰 희생’이라 함을 상류층만의 오만한 자아도취적 자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에 진정으로 ‘갈려나간’ 것은 소수의 귀족들이 아닌 수많은 일반 병사들, ‘보통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귀족 계급이 눈물 흘리고 슬퍼했음에도 실제 참전했던 귀족들의 80% 가까이는 가족들에게 생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 숫자의 비교와는 달리 이 퍼센티지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참전한 이들의 1/5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계급의 1차대전 참전 전사비는 1/8이었다. 또한 그 귀족들은 뒤에서 지휘만 하는 고급 지휘관이 아닌, 절대 다수가 개전 당시 일선에서 복무하는 직업군인이었거나 또는 입대하자마자 초급장교로 최전선에 배치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낮은 사회계급의 사람들과 같은 곳, 같은 환경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총알과 포탄을 맞으며 진흙탕 속에서 전쟁을 치렀다. “We have been unlucky in losing rather a lot of officers in proportion to the men." [우리는 병사들보다 장교들을 오히려 더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불운했다] -솜므 전투에 대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가 평한 이 말에서처럼, 1차대전의 영국 장교들 -귀족들-의 사례는 상당히 유별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영국의 이 귀족들이 1차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전장으로 앞 다투어 달려 나간 모습을 단순히 아름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발현 또는 ‘진정한 애국심의 발로’ 같은 수사로만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들은 명예욕에 굶주려 있었고, 대부분의 젊은 귀족 자제들은 평화의 시대가 너무 오랬던 나머지 전쟁에 대한 잘못된 환상 -전쟁이 명예와 영광으로 가득 찬 신나는 모험일 것이라는 식의-을 가진 채 가벼운 마음으로 군에 자원했다. 또한 이들은 데이빗 카나딘 경의 분석처럼, 18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의 요구와 귀족계급 특권에 대한 일반 사회의 비난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계급체계에 대한 반동으로 전쟁에 나선 것이기도 했다. 점점 더 일부 특권층이 민중 참여 없이 독단적으로 이끄는 정부가 아닌, 일반 대중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어야만 하는 현대 민주정치체제로 변해가는 영국 정계의 세태로 인해 위축되어가며 몸부림치던 기득권층이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자기합리화, 자아증명이자 구원의 기회로 여기며 달려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비록 자신들이 예상하거나 원했던 방향대로가 아니었음에도 큰 희생 -일선에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후방에서는 자신들의 대저택을 병원과 요양원으로 내어주며-을 치르면서 영국이라는 국가에 봉사했다. 그 모습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그들을 진보개혁의 가장 큰 적 또는 개혁의 대상으로 비판해왔던 이들조차 그 희생을 인정하고 애도하게 만들었다. 1880년대부터의 30년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고귀한 봉사를 행하는 모범적 지도층으로 쇄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노블레스 오블리지’하면 1차대전의 영국 귀족들을 꼭 들먹이게 되는 것으로 그 여파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영국의 귀족계급이 그렇게 인정받고자 하며 뛰어들어, 인정받게 된 이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그들에게 있어 종말과 몰락을 앞당긴 사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촉망받는 젊고 뛰어난 인재들이 진창 속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계급에는 아직 많은 이들과 그들의 영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귀족계급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있던 고고한 이미지를 보통 사람들과 진창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어울리며, 또는 그 내밀한 삶의 공간을 병자들과 부상자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스스로 무너뜨리게 되었다. 귀족 여성들 또한 전장에 나선 남성들에 못지않게 간호사로서 환자들의 수발을 들고 지휘체계 아래에 놓여 명령 받고 움직이며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잡역들을 몸소 해내면서 다른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섞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 내에서의 귀족 계급에 대한 이미지는 좋아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더 이상 특별한 가치나 위치를 지닌 것으로 인지되지 않게 되었으며, 귀족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전처럼 크게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단순히 이미지의 변화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전쟁을 치르고 봉사를 하느라 재산을 잃은 문제 이외에, 감정적인 피로의 누적도 심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이 때문에 ‘희생’을 경험하지 않은 가문은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스스로가 무사했더라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죽은 경험이 없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기에 이는 계급적 자의식,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낙관 등에 큰 악영향을 끼쳤고 염세적인 태도가 번져나갔다. 염세적 미래관이나 현재인식은 단순히 귀족이나 영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1차세계대전 세대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그것에 대한 자각과 계급적 생존의 문제는 영국 귀족들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는 그보다 30년 전부터 계속 이어지던 귀족 계층의 쇠퇴와 붕괴의 과정과 합쳐지고 그를 가속화시켰다.
전쟁 당시 영국 자유당 정치인이자 상류 지주층 출신이었던 찰스 거니 마스터만의 1922년 저서 England After the War [戰後의 영국]에서는 1차대전에 있어서의 British Aristocracy에 대해 이렇게 썼다.
"In the retreat from Mons, and the first battle of Ypres, perished the flower of the British aristocracy... In the useless slaughter of the Grenadiers on the Somme, or of the Rifle Brigade in Hooge Wood, half the great families of England, heirs of large estates and wealth, perished... in courage and high effort, and an epic of heroic sacrifice, which will be remembered so long as Englad endures."
[몽스의 대 후퇴에서, 제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영국 귀족계급의 꽃들이 졌다. 솜므에서 무용(無用)하게 살육당한 척탄병 연대에서, 후지 숲의 라이플 여단에서, 영국 대 가문들의 절반이, 거대한 영지와 부의 상속자들이 스러지면서 보여준 용기와 가상한 노력과 영웅적 희생의 서사시는 영국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되게 된 것이 사실이었지만 마스터만의 말대로 영국의 귀족 계급은 다소 무의미하게 살육 당했고, 또 그럼으로써 사회계층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더 빠르게 몰락해갔다.
덧글
원래 초급장교는 잘 죽는거니까요.
장교 하지 않고 그냥 일반 사병으로 갔다면 좀 덜 죽었을듯 한데요.
(이거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군요.)
정도 되겠네요.
1차대전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귀족계급이 몰락하는데 그쪽도 다뤄봤음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