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23 15:13

공지

[1776년 여름.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는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The will of the people is the only legitimate foundation of any government,
and to protect its free expression should be our first object."

"어떠한 정부더라도 그 유일한 합법적 기반은 시민들의 의지에 있으며,
그 의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

- 토머스 제퍼슨 (1743 - 1826), 미 합중국 제 3대 대통령-



서양의 역사. 음악. PC게임. 개인적 신변잡기를 써 올리는 블로그입니다.
가끔 야한거 올라오는 것만 빼면 매우 평범한.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작은 인문학 college 재학 중인 역사학도 입니다.
주변 반경 백마일 이내는 옥수수밭뿐이어서 좀 쓸쓸합니다.
일리노이에 있지 않을 때는,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 가 있겠지요.


2009/11/26 15:33

인문주의와 진보적 가치의 연계성 덜 가벼운 잡담

인문학또는 인문주의가 진보적 가치랑 연결된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 지나친 일반화의 결과다.
알 고어식으로 잘난체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인문학을 정치적 진보성과 연계시키게 되는 것은 나 뿐일까.
거기엔 옳다고는 확언할 수 없어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보수파라 분류되는 정치집단에는 늘 종교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열정적 신앙심과 그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신으로부터의 가호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앙에 가까운 정치 신념이라는데서 그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정치에서 종교의 영향이 큰 사회들을 보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적 정치집단들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자신들의 신앙심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치적 이념도 논리적 '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열정적이고 거의 종교적인 느낌에 가까운 '믿음'에 호소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는 이성과 논리와 인성에 바탕을 두고 이에 호소하는 인문주의 가치에 대비된다.
냉철한 이성의 목소리에 기대는 사람은 신앙 또는 신앙적 이념을 정치와 접목시킬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인문주의는 진보적 가치와 연동된다.


하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진보파라 하더라도 '급진 과격'파 또는 감정에 지나치게 호소하는 세력이라면
인문주의와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소위 '종북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자들이 그러하다.



이 포스트는 밸리로는 안보낸다.

2009/11/26 12:23

읭? 벌써? 2009년 내가 추천하는 이글루 TOP10 가벼운 잡담

올해는 이상하게 빨리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아무튼 어영부영 추천들 했습니다.


  • 슈타인호프의 홀로 꿈꾸는 둥지 by 슈타인호프
    이분의 다방면 역사 포스팅들은 역사적 지식과 정보의 산물입니다. 이분이 2008년에서야 Top100 오른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앞으로도 연속으로 Top100찍어 마땅하다 생각합니다.
  • 뉴히스토리아 by 레드칼리프
    요즘은 별로 활동이 없으시지만 포스트 모더니스트적 역사관을 보여주는 역사 만화들에 참으로 공감 많이 하고 배우는 바도 많았습니다. 어떤 면에선 굽시니스트님의 역사 해석 이상이기도 하지요.
  • YPRF(청년혁명전선)사령부 by Cicero
    저도 모르는 미국사의 이면들을 이분의 포스팅들을 통해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올해의 주요 역사 블로거 가운데 이 분을 주저 없이 뽑겠습니다. 좀 더 자주 써 주시면 좋으련만.
  • 초록불의 잡학다식 by 초록불
    말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분들이 이유를 대셨겠지요. 아직 초록불님의 소설들은 사는 국가가 달라 접해보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 迪倫齋雜想 by 迪倫
    사학 전공자 어르신 (__). 경제사 포스팅들을 정말 흥미진진히 읽고 있습니다.
  • Lair of the xian - Scroll 壓迫帝國 by The xian
    09년 '진보계' 블로거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Ozzyz님이나 미친과학자님은 굳이 제가 추천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 moastone.net by 모아
    정말 열심히 서브컬쳐-일본 야겜 원화가라던지- 블로깅을 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아무튼 그 열정과 지식의 넓이가 감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by Zannah
    스타워즈 블로그. 전 스타워즈 정보를 얻기 위해 굳이 영미 포럼들을 돌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분이 다 올려주시니까요. Top100에 능히 들어가셔야 할 분이라 생각합니다.
  • 카카루 씨- 아침입니다. by 카카루
    깜생깜사 까까루씨 블로그와 수카카작바라인의 매서움을 보며 늘 웃고 즐기고 있습니다.
  • 김구농의 강철의 가마솥 by 울트라김군
    인형기동병기! 모형! SF! 제가 내색은 안하지만 늘 한편으로는 매료되는 서브컬쳐를 이분만큼 열심히 다루는 분이 이글루스에 있습니까?
이글루스TOP100



더 추천하자면 더 추천하고 싶지만 열 명밖에 추천 못하는걸 어찌하겠습니까.


아무튼... 포스트 하나 올리고선 마이를 도는데 이글루스Top100얘기들이 돌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에는 훨씬 시간을 두고 추천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좀 빨리 하는 것 같습니다.





ps.

저는....

워낙 마이너한 곳이 08년에 Top100 인기 블로그로 선정된게 참 당황스럽고도 감사할 따름이었는데
(방문자 수는 많아 보이겠지만 전 이글루스 내에서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을 겁니다,)
올해도 뽑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_-; [....]

2009/11/26 11:38

러셀 백작 가문 이야기. British History

전에 예고한 대로.

[Bertrand Russell, 3rd Earl Russell]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로 꼽힐만한 위인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고대로부터의 단어 Philosophy를 현대적 의미의 ‘철학’이란 뜻으로 국한하지 않고, 그 단어가 가졌던 원래 의미인 ‘인문학’이란 범주로 넓혀 보자면,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에 반대하기란 힘든 노릇이다. 대학자이자 사회개혁가, 반전 운동가였던 버트런드 러셀. 하지만 러셀이라는 성은 버트런드 러셀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러셀 가문의 인문학과 진보적 가치 추구는 그 전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제 3대 러셀 백작이었고, 그 러셀 백작 가문의 시조는 존 러셀(John Russell, 1792~1878) 공이었다. 러셀 가문은 노르만 침공기 때부터의 오랜 귀족집안이었고, 존 러셀은 그 러셀 혈족 중에서도 베드포드 공작가에서 태어났다. 제 6대 베드포드 공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존 러셀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진학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중퇴, 정계에 투신했다. 막대한 부와 깊은 전통을 지닌 최상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존 러셀은 급진적인 진보주의 정치가 되었다. 그는 1813년부터 휘그파 하원 의원이 되었고, 휘그당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사회 개혁파에 속했다. 챨스 그레이 총리 내각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정부의 개혁 성향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휘그당의 당수가 된 존 러셀은 소위 ‘내정의 민주화’로 불리우는, 지방자치체제에서의 대중 참정과 민주주의 강화를 주도했으며, 그와 휘그당은 공장 근로자의 노동 시간 단축과 사회 보건복지의 보강을 추진, 성공했다.


[John Russell, 1st Earl Russell, Prime Minister of UK]



존 러셀은 1846년부터 1852년까지 영국의 총리Prime Minister를 지냈는데, 그의 재임 기간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시기와 겹쳐져 있다. 존 러셀 본인은 아일랜드인들에게 동정적이었다고 전해지나, 그의 내각의 사태 대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아일랜드 인들의 대규모 이민, 사망, 빈민화로 이어졌고 규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총리 시절은 그 명성의 오점이다.

1861년에 존 러셀은 러셀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그로 인해 베드포드 공작 가문과는 별개의, 러셀 백작 가문이 생겨나게 되었다. 제 1대 러셀 백작의 아들인 앰벌리 자작 존 러셀(1842~1876) 또한 아버지처럼 정치에 투신했고,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었다. 이 아들 존 러셀의 사회관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매우 급진적이고 특출났다. 아버지 존 러셀은 아들 존의 그 가치관을 바꾸려 노력했으나 아들 존은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자신의 아들에게 그 가치관을 교육시켰다. 그는 무신론자였으며 낙태 찬성론자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가치관들 때문에 그는 하원에서 재선되지 못했다.


[John Russell, Viscount Amberlay, MP]




그러니, 무신론자에 낙태 찬성론자였던 존 러셀의 아들 버트런드가 20세기 최대의 무신론자이자 인문주의자로 자라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 러셀은 아들 버트런드가 태어나던 해에 존 스튜어트 밀(!!)에게 아들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고, 대 철학자 밀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밀은 그 이듬해인 1873년에 사망했지만 그 업적은 버트런드 러셀이 평생 참고하게 된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부모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지는 못했다. 어머니 캐서린은 1874년에 병으로 인해 버트런드의 누이인 레이첼과 함께 세상을 떴으며 아버지 존 러셀도 그 충격으로 같은 해 사망하여, 버트런드와 그 형 프랭크는 조부인 전직 총리 존 러셀 백작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버트런드는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은 인자한 노인’으로 회상하곤 했다) 존 러셀 백작은 1878년에 사망하였고, 그에 따라 러셀 가문은 러셀 백작부인(프랜시스 앨리엇)이 꾸려나갔는데, 이 노 백작부인도 예사로운 여성은 아니었다. 백작부인은 독실한 침례교인 이었지만 종교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백작부인은 다윈의 진화론을 믿었고 지방분권자치제(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정부가,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부가 다스려야 한다는)를 지지했고, 사회정의 구현에 관심이 컸다.

그러한 할머니 밑에서 프랭크와 버트런드 형제는 성장했다. 형인 제 2대 러셀 백작 프랭크 러셀(Francis Russell, 1865~1931)은 당시 영국 상류 사회에서 그의 여성 편력으로 큰 스캔들을 일으키고 중혼문제로 인해 법정에까지 서야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캔들 이외의 부분에서 프랭크 러셀은 상당히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는 귀족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노동당(Labour Party)에 입당하였고, 영국 상원(귀족원)에서의 노동당 대표로 활약했으며, 당시로서는 매국노 취급받기 딱 좋았던 반전주의(또는 평화주의) 지지 정치인이었다. 그는 1929년부터 죽을 때까지 영국령 인도의 국무장관을 지냈다. 기이한 업적도 남겼는데, 영국민 최초로 자동차 면허판을 받았고 자동차 스피드광이었던 그는 교통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고속도로의 속도제한을 철폐했다. (다행히도 속도제한은 그가 죽고 난 직후 부활했다)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907.]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업적과 저서는 너무나 방대해서 지금도 계속 연구가 진행 중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분야에서 지식을 쌓았다. 수학-기하학, 경제학, 사회학, 윤리학, 철학, 역사학 등, 그는 어느 특정 분야의 학자라기보단 전반적 의미에서의 인문학자였다. 1차세계대전 중에 러셀은 반전 평화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대학 강사직에서도 잘리고 벌금형에 6개월 금고형까지 선고받았다. 이 반전 평화주의는 버트런드 러셀 평생의 이념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지지했으나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이후 스탈리니즘이 될-을 맹 비판했다.

1931년에 프랭크 러셀이 죽자 버트런드 러셀은 제 3대 러셀 백작이 되었다. 2차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이르면 러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UCLA와 시카고 대학 등 대학들에서 강의를 했는데, 1940년에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그의 ‘성 도덕관’이 문제가 되어 (사실은 그의 무신주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무신론자’하면 흔히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떠올리나, 리처드 도킨스의 사상적 원조(이자 그의 저서들에서 계속 인용하는 건)는 버트런드 러셀이다. 러셀의 에세이집 “Why I Am Not a Christian"은 오늘날 무신론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변이다.) 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 때 세계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러셀을 옹호했는데, 그 지식인들 중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러셀은 서양 철학에 대해 강의하는 것에 전념했고 그 강의 내용을 기초로 러셀 최대의 저서인 "History of the Western Philosophy"(서양철학사)가 저술된다. 서구문명의 철학사를 집대성하고 정리한 서양철학사는 오늘날에도 최고의 인문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러셀 살아생전에는 고마운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서양철학사 외에도 그의 여러 저술활동으로 인해, 러셀은 194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50년대와 60년대를 식민지 독립, 핵무기 반대, 베트남 전 반대 운동에 투신하며 당시 좌파 청년들의 우상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핵 군축 성명은 아인슈타인 혼자 한게 아니라 러셀과의 공동작업의 결과였다. (그 성명의 정식 명칭은 “Russell–Einstein Manifesto” 다.) 그렇다고 그가 친 공산주의자였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의 비판대상에는 모든 전체주의적, 독재 정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일으킨 중동 전쟁들 또한 비판하며 이스라엘이 중동 국가들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에 92세를 일기로 장수하고 사망했다. 그는 형 프랭크처럼 일생을 여러 여자들과의 재혼과 이혼과 불륜의 사이클 속에서 보냈는데, 그 얽히고설킨 관계들 속에서도 훌륭한 아들이 태어났다. 버트런드 러셀의 죽음 후에 4대째로 러셀 백작의 이름을 물려받은건 그의 두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던 존 러셀이었고, 그가 1987년에 죽었을 때 제 5대 백작이 된 것이 그 이복동생인 콘라드 러셀이었다.


[Bertrand and Conrad. 1941.]



제 5대 러셀 백작 콘라드 러셀(Conrad Russell, 1937~2004)은 버트런드 러셀의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가까이서, 또 오랫동안 받은 아들이었다. 콘라드 러셀은 이튼 스쿨 재학 후 옥스퍼드대를 졸업했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역사학에 전념했다. 그의 17세기 영국사- 영국내전사, 영국정치사- 연구는 그를 해당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학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내가 뭐 페이퍼 하나 쓸라치면 꼭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콘라드 러셀의 논문들이다! 어렵다! ㅠㅠ)

바로 이 콘라드 러셀의 연구들 덕분에 영국 내전사와 의회-왕권 대립에 대한 해석이 재조명받게 된다. 영국 내전에 대한 과거의 ‘억압적 왕권에 대항한 민중 혁명’식의 단순 해설이 반박되었으며, 영국 내전을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분열은 훨씬 더 장기적이고도 거시적 시각에서 분석되게 했다는 것이 영국 사학계에서의 콘라드 러셀의 가장 큰 업적이다. 그는 예일대에서, 그리고 런던대에서, 마지막에는 죽을 때까지 런던 킹스 컬리지에서 영국사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다방면에 투자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영국사, 그것도 17세기라는 특정 분야에 집중했다. 그의 저서 “The Fall of the British Monarchies 1637–1642(영국 왕정의 몰락)"는 오늘날 영국사의 최중요 저작 중 하나다.


[Conrad Russell, 5th Earl Russell]



콘라드 러셀의 업적과 활동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87년에 제 5대 러셀 백작이 된 직후 그는 상원에서 영국 자유민주당의 주요 지도자이자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스스로가 귀족이었으면서도 귀족 계급 자체의 철폐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전반적 정치 경력은 열렬한 사회개혁론자의 그것이었다. 1999년에 영국 상원이 개편되고 비귀족 일반인이 참여하게 된 개혁에는 러셀의 활약이 일부 작용했다. 그는 죽기전까지 정부의 보수적 태도를 비판했다.(참고로 그의 상원에서의 연설은 늘 역사적 경구나 사건을 인용하거나 역사를 돌이켜보며 반성하는 내용이었고, 그 덕에 잘난체 한다는 야유도 받았다.)


2004년 콘라드 러셀의 사망 후 현재 제 6대 러셀 백작인 니콜라스 러셀(Nicholas Russell, 1968~)은 영국 노동당원이며 핵무기 폐지론자이며 열렬한 장애인 인권 운동가다. 그는 현재 왕립 맹인 권리협회의 사무장직에 있다. 1999년 개헌으로 인해 그는 귀족이지만 상원의원이 아니게 되었으나, 차기 선거에서 노동당 측 의원 후보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러셀 백작 가문의 ‘명성과 전통’은 세월의 권위가 아닌 행동과 업적으로 일구어졌다.

'그저 귀족일 뿐'인 많은 가문들과 참 비교 되지 않는가.




이 포스트에 적힌 사실들의 상당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2009/11/25 18:27

내일부터 이어질 차기 역사(영국사) 포스팅 주제들: General History

아래 로마사 포스트로 스타트를 끊은 셈 치겠습니다.

오랜만에 이 블로그 정체성을 재확인 하는 글을 쓴 기분이어서 참 개운하네요.
그동안은 괴한에게 얻어 터지고 기말고사에 시달리고 등등의 일들 때문에 블로그를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방학동안 여러가지 써 볼 생각입니다. 방학 끝나고도 학기 초 동안은 어느정도 한가할 테고.


그래서 이후 쓸 내용들은 뭐로 할까 미리 정해 놓겠습니다. 마치 새해 목표 정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1. 러셀 부자의 인문학
2. "죠지 왕의 광기"
3. 세기의 스캔들: 리처드 헌의 죽음과 헨리 8세의 종교개혁
4. 영국 내전의 발발 배경과 사학자들의 논쟁, 그리고 찰스 왕을 위한 변.
5. 영웅적 성기사? 영국 왕 헨리 5세의 진 면모에 관해.
6. 에드워드 왕의 웨일즈 점령과 영국화, 그리고 그 웨일즈 정체성의 유지에 대해.
7. 아쟁쿠르 전역에서의 헨리 5세 예하 영국군의 실태
8.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다음편 (-_-)
9. 영국식 애국주의의 발현
10. 반도전쟁 다음 편 (-_-)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창하게 써 놓긴 했지만 다 짧게 짧게 쓸 겁니다.
대부분은 A4 용지 두 장 분량 또는 그 이하 정도로.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말하자면 분량은 유동적이라는 거지요. 저도 새로 산 게임은 좀 하고 살아야겠으니까요.

2009/11/25 17:46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 공화국을 멸망시킨 분열 General History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역사글을 씁니다. 좀 길지만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프티마테스Optimates포풀라레스Populares. 흔히 로마 공화국 후기 정계를 나눈 두 파벌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오프티마테스나 포풀라레스 둘 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당파’는 절대 아니었고, 가끔은 그 소속원들의 정체성도 다양하거나 모호했기에 공화국 후반의 정치를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공화당 대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프티마테스는 ‘노빌레스Nobiles’나 ‘파트리키Patricii’와 비슷한 의미를 내포한 사회 계층 명칭에 가까웠고, 포풀라레스는 주로 ‘선동꾼’ 내지는 ‘좌빨’과 유사한 느낌의 모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도래하게 한 사회/정치적 분열을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충돌’이란 이름으로 해석하고 명명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후기 공화국을 뒤흔든 모든 주요 정치적 사건들 - 그라쿠스 형제의 살해(기원전 133년과 121년),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내전(기원전 88~82년), 카틸리나 반역 사건(기원전 63년),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조폭 민주주의’(기원전 58~53년),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기원전 49~45년), 그리고 카이사르의 암살(기원전 44년) 모두 이름있는 개인들이 각자 일으킨 사건 또는 단순 사회현상 이상의,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라는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이라는 전반적인 분열이 직/간접적으로 낳은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오프티마테스Optimates는 공화국의 상류층Nobiles 중에서도 일반 민중Plebs의 정치 참여와 그 플레브스를 대표하는 호민관들Tribunates의 정치권력의 확대를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견제하려 했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뜻 있고 족보 있는 소수’가 전통적으로 그래왔듯 계속 로마를 통치해야 하며 공화국 체제에 대한 어떠한 변혁이나 조정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할아버지(기원전 236~149년)와 손자(기원전 95년~46년) 둘 다]로, 초기 공화국 탄생기의 위엄있고 청렴하며 고귀한 국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후기 공화국 원로원에도 다시 부활시키는 듯 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많은 오프티마테스들은 카토처럼 정의롭거나(또는 정의로운 행세) 청렴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그냥 자기 이권의 수호에만 관심있어 하며 가끔은 무척 부패한 자들이었으나, 어쨌든 대부분의 오프티마테스들은 거창하게도 자신들이 공화국 정치와 가치의 수호자라고 보았다.

한편, 포풀라레스Populares는 또 다른 정치관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어느 정도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오프티마테스와는 달리 포풀라레스는 어느 하나의 정치 이념도, 특정 집단도 아니었으며 서로와 무관하게 나타난 개인들을 뭉뚱그려 하나로 묶으려 할 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 나서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포풀라레스란 ‘도시 빈민 문제 해결 및 서민 생활 조건 개선, 토지 개혁과 국유지 분배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정치를 표방하며 일반 대중의 지지를 권력의 밑바탕으로 삼은 정치가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기원전 168~133년, 가이우스: 기원전 154~121년)처럼 개헌을 요구하거나 서민들을 위해서 발벗고 뛴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물론, 여기서도 그라쿠스 형제처럼 이상주의에 젖은 열정적 혁명가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저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체계적인 공직 생활을 거친 전통적 방법이 아닌 민중 지지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한 자들일 뿐이었다.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본격적 충돌은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나타났다. 이때까지의 로마 공화국은 반박할 수 없이 확고한 과두정Oligarchy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좋았지만 상류층인 노빌레스Nobiles가 정치를 좌우하는 체제였다. 일반 대중의 정치권력과 참정권을 나타내는 호민관Tribunus 직책은 이때까지는 그저 ‘전통’에 불과한 유명무실한 자리에 불과했는데, 이 직책을 갑자기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위치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개인 권한으로 입법을 추진할 수 있고, 신규 법안이나 정책에 대해 혼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권한이 부각되었고, 그라쿠스 형제는 자신들의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그 호민관의 권력을 한계까지 사용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그리고 이런 호민관들을 대중은 열렬하게 지지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기존 노빌레스들은 같은 귀족이면서도 서민에게 지나친 힘을 주어주려 한 그라쿠스 형제를 살해했다. 하지만 살해만으로 해결되기에는 문제는 이미 커져있었다. 민중 참정권과 참여의식이 고양되었고, 호민관으로 입후보하는 수많은 정치가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제시한 그 직책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참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4세기의 ‘계급 투쟁’ 후 2세기만에 계급 분열과 투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귀족-서민간의 이분 충돌이 아니라, 중요한 제 3 요소가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문제는 심화되었다. 바로 에퀴테스Equites, 즉 기사 계급의 성장이라는 요소였다.

로마 공화국의 중산층은 ‘기사’계급으로 불리는 에퀴테스였는데, 이들은 로마 시 자체 뿐 아니라 로마 밖 동맹 도시들과 지방의 유력자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산계급의 영향력과 세는 기원전 2~1세기 경에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로마 공화국의 지중해에서의 팽창과 때를 같이했다. 원정가는 군단병들의 무장을 지급하게 된 것은 정부와 계약을 맺은 에퀴테스 출신의 군수업자들이었고, 점령된 신영토 또는 보호국에서 통상을 담당한 것도, 직할 식민지에서의 징세꾼 역할을 맡은 것도 모두 에퀴테스들이었다. 로마 공화국에는 정식 관료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식민지 통치와 체계적 세금 징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에퀴테스 출신 기업가들이 운영하는 사기업 집단Cartel 또는 징세원Publicani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재화가 빼돌려져 사유 재산으로 축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공화국의 에퀴테스 계급은 플레브스와 노빌레스와 견줄만한 신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전통적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 고위 공직에 오르고 원로원의 일원이 되는, 그런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의 노비 호미네스Novi Homines라 불렀는데, 이러한 노비 호미네스들은 대개의 경우 신흥 에퀴테스 집안 출신이었다. 물론,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노빌레스 집단은 이런식의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고, 노비 호미네스들은 당연히 정치 생활 내내 주변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야했다. 그렇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노비 호미네스가 몇 되지 않은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역사에 이름을 실제로 남긴 몇 안 되는 ‘신인류’중에서 단연 유명한 것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특히 포풀라레스 세력을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끌어올리고 공화국의 사회분열을 촉진시킨 공 또는 악덕이 큰 인물이다. 그 유명한 ‘마리우스 군제개혁’을 통해 공화국 군대는 상비 직업군대로 변모하게 되었고, 그 직업군인들은 국가 체제보다는 장군 개개인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제대한 후에도 퇴역군인들은 국가보다는 유명 정치가(대개는 현역 시절 자신들을 이끌던 장군) 개인의 이익을 위해 발벗고 뛰었고, 이는 소위 포퓰리즘, 당시 말로 포풀라르 정치를 확실히 가시화시키게 되었다. 사병에서 사령관까지 군력을 쌓아올려 로마 상류사회에 들어간 마리우스는 정계에 입문한 순간부터 서민층의 지지를 노린 정책을 폈고, 그라쿠스 형제 이후 주춤하던 민중기만 정치를 다시 구현하게 됨으로써 포풀라레스라는 이름의 어떤 정치 집단, 또는 기조를 재형성하게 된다.

그러한 포풀라레스 집단과 마리우스를 상대해 내전을 벌인 오프티마테스와 그 지도자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한푼 없이 가난하게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술라는 젊은 날을 플레브스, 즉 서민층 사이에서 보냈고, 스스로의 정치 경력 또한 서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술라는 공화국의 전통과 ‘원로원에 의한 통치’라는 기존 원칙을 수호하고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마리우스 일파와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끝나자 술라는 스스로를 독재관으로 선언하고는 일련의 극단적 정책들을 폈다. 호민관의 입후보 자격은 좁디좁게 한정되었으며 그 권력과 권위는 극단적으로 최소화되었다. 민중 집회와 집회를 통한 입법 절차등은 모두 폐지되었으며 대중 참정의 길은 모두 막히게 되었다. 더 이상 그라쿠스 형제같은 극렬 혁명가들의 등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반면 원로 의원Senator의 권한은 불어났고, 원로원의 의원 숫자는 기존의 세 배로 확 늘어났다. 모든 정책 결정과 법안 상정 등의 권한은 과거에 그랬듯 원로원에 집중되었다. 이는 술라의 독재기간의, 그리고 오프티마테스 정치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독재자 술라.]



하지만, 바로 그 술라가 자신의 군력을 쌓고 지지기반을 닦았던 바로 그 전쟁의 결과가 술라의 정책과 그를 지지했던 자들이 추구했던 바를 무너트렸다. 동맹시 내전, 영어로는 사회전Social War라고 부르는 그 전쟁. 시민의 의무를 모두 지니고 있음에도 시민권도 없이 주권시민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이탈리아 동맹시의 시민들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며 로마와 벌인 그 이탈리아 내전은 로마의 양보와 양자 합의로 끝났었다. 여기서 로마의 양보, 즉 로마 시민권 대상의 확대는 다시 말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증가를 뜻했다. 이제 로마의 정책은 단순히 로마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시 밖에서 온 이탈리아인들의 손에도 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새로이 힘을 얻은 에퀴테스 계급이 뛰어든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오프티마테스가 원로원 중심의 정책을 폈어도 다시 이탈리아 내전을 치를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정치권은 포풀라레스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술라는 기원전 80년에 독재관 자리에서, 그리고 79년에 집정관 자리까지 모두 내놓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해 살다 기원전 76년에 사망했다. 술라가 죽은 직후, 술라가, 그리고 오프티마테스가 이룩했던 체제는 순식간에 뒤집히게 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풀라레스 정치가’로 분류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술라가 죽은 직후 그가 추진한 법안은 바로 로마의 포룸에 내전에서 패해 반역자로 분류되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상을 다시 세우고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술라의 공포정치 하에 숨죽이고 있었던 포풀라레스 세력과 민중들은 ‘민중의 친구 마리우스’를 외치며 카이사르의 주장에 동조했고, 오프티마테스 측 의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동안 이미 십수년 전 죽은 마리우스는 복권되었다. 그리고는 차례 차례 술라가 폈던 정책들과 법안들이 뒤집혀가기 시작했고, 호민관의 권한은 다시금 복원되었다.


술라의 압도적 독재로 인해 잠잠해졌던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분쟁이 다시 심화되던 무렵에 중요인물로는 앞서 언급했던 키케로가 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지방 에퀴테스 출신이었다. 연줄 없이 법조계에 진출해 그 변호실력만으로 신분상승의 계단을 오르고, 공직에 출마해 결국은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 그 입지전적 인물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잊지는 않았으나 그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려 했다. 그가 늘 고려했던 정치 목적은 기사계급과 귀족계급의 화합과 공존이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는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서 있었다. 그는 늘 중립을 표방하고자 했으나 구분을 하자면 그는 언제나 오프티마테스 파벌의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62년의 집정관 선거에서 정치자금을 모두 날려먹고는 실패해 희망을 잃은 귀족,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체제전복을 꿈꾸며 쿠데타를 준비하던 기원전 63년, 그의 쿠데타 계획은 사전에 새어나갔고 당시 집정관이던 키케로는 이를 즉각 진압했다. 음모가 발각된 바로 다음 날 당당하게(뻔뻔하게) 원로원에 출석한 카틸리나를 마구 비난하던 당시 키케로의 연설은 키케로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을 매우 잘 반영해 준다.


[카틸리나를 비난하는 키케로]



키케로는 역사적으로 민중권익의 대변자였던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예로 들며 국가에 해가 되었던 자들은 그 공과에 대한 고려 없이 모두 처단되었다는 말을 하며 카틸리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보여지듯, 키케로는 평생의 편지와 연설과 저술에서 거듭 그라쿠스 형제와 그 사상에 대한 반감을 표명한다. 그에게 있어 애국이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라는 체제 그 자체를 위하는 마음이었고, 그러한 그의 태도는 대다수 오프티마테스들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바였다.

카틸리나 연설에서 키케로는 카틸리나와 그 일당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요구하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명성이나 인기 같은 것을 고려하면 국가대사를 위해 유익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중의 인기와 반응에 연연하며 인기를 보존할 방법만 택하는 정치가는 옳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포풀라레스 세력을 매섭게 비판한다. 포풀라레스로 분류된 정치가는 그 방향과 사상, 목적에 관계없이 무조건 ‘인기몰이만 하려드는 정치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로 매도되었고, 이는 키케로 개인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사실, 키케로의 포풀라레스 정치에 대한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다. 키케로의 시대 쯤 오면 소위 민주정치란 극단적 중우정치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사례다. 본디 귀족 출신인 클로디우스는 스스로 서민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호적을 바꾼 다음 기원전 59년의 호민관 선거에 나서 호민관에 당선되었고, 그가 호민관을 지내는 동안 로마의 정치판은 몰락할 대로 몰락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무장 갱단을 이끌고 정책을 무력으로 집행했으며 폭도들을 선동함으로 반대세력의 목소리를 죽였다.

카틸리나 반역 사건에서 진압된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은 당대의 포풀라레스의 당수나 다름없는 자들이었고, 그 후대 포풀라레스의 영도자 비슷한 위치에 선 클로디우스는 그 카틸리나와 그 동맹들을 처형시킨 전 집정관 키케로를 매도했다. 곧 클로디우스는 폭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키케로를 몰아냈고, 키케로는 시내 가산마저 모두 압류당한 채 이탈리아를 쫒겨나듯이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클로디우스가 호민관으로써 편 정책들은 그야말로 포풀라레스라고 분류되기 적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빈민들에게 일정기간동안 시장 판매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한다는 곡물 분배 정책이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기 무상배급’으로 바뀌었고, 원로원의 집회 해산권이 폐지되었다. 이러한 클로디우스와 그 지지세력을 반대하던 정치가들의 머리 위에는 똥물 바가지가 씌워졌고 원로원의 권위에도 똥물이 칠해졌다.

오프티마테스 세력이 폭주하는 클로디우스를 잡기 위해 마련한 대안은 클로디우스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었다. 기원전 57년,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가 클로디우스의 동료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밀로는 곧 클로디우스가 그때껏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클로디우스를 공격했다. 곧 로마의 시내는 밀로의 갱단과 클로디우스의 갱단이 서로를 때려 부수는 아수라장으로 변모했고, 로마시는 일종의 소규모 내전에 휩싸였다. 혼란은 클로디우스가 기원전 53년에 밀로의 갱단에게 살해되면서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클로디우스의 죽음]



하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밀로의 배후에 원로원이 있었듯, 클로디우스 또한 더 큰 세력의 마리오네트였을 뿐이었다. 그 사주자는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동맹자들- 즉 3두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 그리고 그 동맹자인 크라수스에게는 각자가 갈리아 지방과 파르티아에서 자기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쌓고 있는 동안 로마 내에서도 난리를 쳐 줄 인물이 필요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3두정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가 멀리 동방 원정 중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클로디우스가 살해당하고 밀로가 그 죄로 재판정에 서던 것과 동일한 해의 일이였다. 3두정은 붕괴했고, 클로디우스-밀로 사태의 책임을 묻고자 원로원은 이제 그 카이사르를 끌어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원로원이 이 때 회유한 것은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였다. 카이사르의 우방이자 일시적으로 포풀라레스 세력의 지지자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에퀴테스 출신의 노부스 호모, 즉 ‘신인류’였던 폼페이우스는, 근본적으로는 키케로처럼 오프티마테스였다. 폼페이우스는 그 군 생활과 정치 생활을 모두 과거 독재자 술라의 충복으로써 시작했고, 그의 보수적 성향은 스스로가 상류층에 편입되고 나서부터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카이사르가 이끄는 포풀라레스 운동은 비 귀족 평민 출신의 폼페이우스가 영도하는 오프티마테스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그 유명한 루비콘 강 도하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그 내전의 결과는 기원전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오프티마테스 세력이 완전 격파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뒤를 이은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는 ‘공화국’의 가치와 질서에 너무나도 극명히 위배되는 것이었고, 그를 지지하던 포풀라레스들조차 이에 실망하고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아직 남아있던 오프티마테스의 잔재 세력은 암살을 획책했고, 그에 따라 카이사르는 수십번을 난자당해 살해당했다.



[카이사르의 죽음]




하지만 이제는 포풀라레스건 오프티마테스건 아무도 공화국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공화국이라는 체제는 한 세기에 걸친 두 세력의 분쟁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에는 더 이상 정치 이념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버린 거이다. 그 상황에서 카이사르보다도 더 간악하고 야심찬,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확실한 권력 장악과 신분 상승을 노린 에퀴테스 계급의 지지를 바탕으로 남아있는 기존 권력층을 일거에 청소해버렸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원수 -프린캡스Princeps, 즉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며 에퀴테스 계급은 죽고 없어진 노빌레스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등장한 신 체제 - 제국은 과두정도, 민주정도 아닌 금권정Plutocracy의 세상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읽은 문헌들:

Cicero, Marcus Tullius. Catiline Orations. Perseus Project.


Everitt, Anthony. 2007. Cicero: Rome's Last Greatest Politician. Penguin Books.


Holland, Tom. 2008. Rubicon The Last Years of the Roman Republic. Paw Prints.


Millar, Fergus. 1986. Politics, Persuasion and the People before the Social War (150-90 B.C.).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Vol. 76, pp. 1-11. http://www.jstor.org/stable/300362


Murray, Robert J. 1966. Cicero and the Gracchi.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97, pp. 291-298. http://www.jstor.org/stable/2936013


Seager, Robin. 1972. Cicero and the Word Popvlaris [Cicero and the Word Popularis]. The Classical Quarterly, New Series, Vol. 22, No. 2 (Nov.), pp. 328-338. http://www.jstor.org/stable/638213


Syme, Ronald. 1939. The Rom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Taylor, Lily Ross. 1942. Caesar and the Roman Nobility.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73, pp. 1-24. http://www.jstor.org/stable/283534


Wirszubski, Ch. 1954. Cicero's CVM Dignitate Otivm: A Reconsideration.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Roman Studies. Vol. 44, pp. 1-13 http://www.jstor.org/stable/297549






ps.

이 글은 사실 이번 학기 로마사 과목의 기말고사 내용으로 썼던 것을 바탕으로 해서 한글로 옮긴 겁니다. -_-
그대로 '번역' 한건 아니고 '바탕'으로 해서 '다시 쓴' 거지만.


2009/11/25 12:37

키즈키 아루츄씨(Udon-Ya) 몬스터 헌터 동인지 신작 나왔네요 일본음란만화작가들

예전에 이 작가에 대한 예찬을 편 적이 있죠.

이 사람을 유명케 한 '몬헌 에로책' 시리즈의 제 7탄. 최신작이 막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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