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한국에도 영국이나 일본처럼 사극/역사 드라마 같은 장르가 존재 합니까?
답: 그런거 없습니다.
딱 하나만 빼고.
유일의 사극
by 월광토끼
Amazon.com에서 구입한
Clalaclan Philias Noir PVC Statue. (코토부키야제 1/8 스케일).
도착은 며칠 전에 했는데 포스팅은 이제사.
가격도 꽤 싼 편이었지요. $40.이어지는 내용
by 월광토끼
즐겨가는 카페에서 내가 즐겨 먹는 메뉴는 이름은 특이하게도 "뉴요커"다.
뉴욬에서 족히 700마일은 떨어져있는 곳에서 음식 이름이 뉴요커인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간단히 말해 훈제 연어를 넣은 베이글 샌드위치다. 베이글과 연어를 즐겨먹는 미국 동해안 식습관에 빗댄 듯.
무척 맛있다.
뉴요커처럼 식사하며 카페 안에서 책 읽고 넷북으로 글 썼다.
아 굳 된장 라이프.
by 월광토끼
소위 계몽시대이후의 18세기 내내 수백의 영국 신사들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원전 고대로부터의 전통인 결투가 빅토리아 시대까지 계속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죠지 3세 치하의 유명한 제임스 길크라이스트(20세기 유명 테너 가수 말고)는 무려 172회의 1대1 결투를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투의 관습이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은 1500년대 들어서부터였는데, 어찌나 신하들이 이 결투로 많이 죽어나갔는지 제임스 1세는 결투 금지법안을 발효하기도 했지요. 그 뒤를 이은 챨스 1세나 국왕을 참수한 올리버 크롬웰도 마찬가지로 결투를 사회 내에서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공화국 시대가 끝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후부터 결투는 다시 유행을 탔고, 챨스 2세는 ‘사람 죽이는 일’을 싫어했고 결투 또한 혐오했으나 특별히 법적 제한 조치를 취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대 프랑스의 군주였던 루이 13세는 결투를 금지시키기 위해 제도적으로 아주 강압적인 정책을 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결투로 맺어진 우정..,;]
물론 이러한 결투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며 비판한 지식인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결투가 마치 상류층 고유의 전통이자 특색인 것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결투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행했지요. 마구잡이 쇼핑, 도박과 함께, 결투 또한 ‘차갑고 계산적이기만 한’ 하층민들의 특성에 대비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상류층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ㅁ-
물론, 원래 영국법상 ‘분노가 치밀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한 살인은 과실치사로 인정되는 한편, 화가 나는 상황에서 시간이 한참 지나 이성을 찾은 상태에서 한 살인은 그야말로 고의적 살인으로 인정되는 만큼, (결투는 서로 감정상하고 난 다음에 날을 잡아서 며칠 후 하는 거였으니 대부분 후자였죠) 기소된 결투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했습니다만, 상류층의기조와 사회 분위기 때문에 법관들, 판관들은 범법 결투자들을 기소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군대, 특히 장교들 사이에서는 결투가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전쟁이 없는 시기의 병영이나 군사기지에서 훈련 외에는 음주와 도박이 주된 일이였고, 여기서 발생한 장교들끼리의 감정싸움은 그대로 결투까지 이어지기 마련이었죠. 이건 해군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승조원들밖에 보는 사람이 없고, 오랜 해상 생활 등으로 기분이 날카로워진 사람들로 가득한 전함 안에서 결투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겠죠. (포레스터의 ‘혼블로워’ 시리즈에서 묘사된 혼블로워가 생도 시절에 벌어진 결투처럼)
몇몇 군 내 결투들은 군법회의로까지 이어졌습니다만, 민간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소자가 벌을 받는 일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호랑이’ 로슈 소령의 경우가 그러한데, 로슈 소령은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자 자기를 고발한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해 그를 죽이고, 또 그 고발자에게 ‘거짓’ 증언을 해준 동료 장교에게도 결투를 신청해 그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옛 상관이었던 대령에게도 찾아가 지난 날의 앙금을 풀고자 또 결투를 신청해 죽였지요. 그는 군법회의에서 모두 면죄되었습니다.
이런 결투들은 17세기 동안은 레이피어 또는 단검을 가지고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투를 자주하는 상류층 자제들을 위해 검투술 학원도 난립했지요. 그런데 이러니까 문제는 더 부자여서 학원을 많이 다녀 검술이 더 뛰어나게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실력 차이가 발생하고, 결투는 공평하지가 못하게 되겠죠? 검술이 더 뛰어난 사람이 무조건 다 이기게 돼 있으니까요. 그래서 18세기부터는 좀 더 공정하고 운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권총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또 솜씨 좋은 총잡이가 다 이기는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으나, 당시의 머스킷 피스톨 성능으로는 설사 특등사수가 잡는다 하더라도 결과는 거의 운에 달린 거나 다름없었지요.
결투는 국가의 인재들을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앗아가기도 하는 존재였습니다. 1803년에는 왕실 해군의 맥나마라 함장이 하이드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육군의 몽고메리 대령의 개가 짖어대었다는 이유로 서로 말싸움을 했고, 말싸움은 결투로 이어져 몽고메리 대령이 사망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맥나마라 함장과 몽고메리 대령은 둘 다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들에 참전해 공훈을 세웠던 베테랑들이었고, 그러한 인재들이 적과의 전투가 아닌 아군과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국가로서 큰 손실이었죠. (맥나마라 함장은 나중에 해군제독의 지위에까지 오릅니다)
[피트 vs 티어니.]
마찬가지 사건으로, 1798년에는 무려 수상 윌리엄 피트(小 피트)가 하원에서 하원의원 죠지 티어니와 해군 수병들의 함상 훈련도에 대해 입씨름을 하다가 화가 난 티어니가 수상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다행히도 둘 다 총알이 빗나가서 사건은 그걸로 종결됩니다. 만약 그 위험한 시기에 수상 피트가 목숨을 잃었더라면 지금 런던에는 삼색기가 휘날리고 있었을 겁니다.
중요 공직자들이 결투를 벌인건 그게 마지막도 아니었습니다. 1809년에는 당시 외무장관 죠지 캐닝 (1827년 수상)과 전쟁장관 캐슬리 자작 (1812-1822 하원의장)이 정치적 견해 차로 결투를 벌여 둘 다 중상을 입고 실려나가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고, 1829년에는 당시 수상이었던, 무려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카톨릭 교도 해방법안 가결을 놓고 상원에서 윈첼시 백작과 결투를 벌입니다. 윈첼시 백작은 아예 총을 쏘지 않았고 웰링턴 공작이 쏜 총알은 빗나감으로써 그냥 둘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웰링턴 vs 윈첼시.]
결투가 영국 사회에서 간신히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도덕성의 사회’가 도래한 빅토리아 시대 중기나 되어서였습니다.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그냥 사회 기조에 의해 도태된 거였죠.
영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행해진 결투는 1852년 프랑스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결투였습니다. -_-
참고문헌: S. Brumwell and W. Speck. Cassell's Companion To Eighteenth Century Britain. Cassel&Co, 2001.
by 월광토끼
나흘 내내 비만 주륵주륵 내리다가 좀 개였다.비내린 후라서 공기는 가을이 아닌 겨울 공기였지만, 교정 풍경은 완연한 가을.카페로 공부하러 가던 도중 기분도 삼삼해서 여기저기 캠퍼스의 사진들을 찍었다.춥다.
by 월광토끼
.....Simone de Beauvoir, Jean Paul Sartre, and Ernesto 'Che' Guevara. 1960, en La Habana, Cuba
by 월광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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