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미국독립전쟁 요약보기전체보기목록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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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인들의 반응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그 소식과 선언문 사본이 런던에서도 발표되었을 때 당대의 인기 잡지였던 ‘The Gentleman’s Magazine’에서는 이런 사설을 실었습니다.“그 감수성과 언어를 고려하자면 이 선언문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특출난 것이지만, 저자의 박식함이나 정직성에 불명예만 더해주는 물건이다. 그들은 “우리는 이러한 사실...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7.

라파예트 후작은 '충성 선언' 이전에 이미 대륙군의 요직에 앉은 상태였다.라파예트 후작은 처음 대륙군에 합류한 시점에서부터 자신에게 일개 사단의 지휘권을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 해왔다. 당연히 총사령관 죠지 워싱턴은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이 애송이가 뭐라는 거야' 정도의 생각을 가졌고, 그 요청에 대해 불평하는 서한을 의회에 한 번 보내기까지 했었다. 그...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6.

이번 편에서는 라파예트 본인에 대한 얘기보단 그 주변 상황에 대해 주로 얘기합니다.브랜디와인 하천에서의 전투 후 대륙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다. 그 지휘관인 죠지 워싱턴에 대해서도 불신과 악평 일색 뿐이었고 전군의 사기와 기강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죠지 워싱턴 중장의 부관이었던 토마스 피커링은 당시 그에 대해 이런 평을 남긴다. "그는 용병하는 사...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5.

대륙 의회 (즉, 미 연방 임시정부)는 라파예트 후작과 그 일행을 문전박대 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딘의 추천서와 한발 늦게 당도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추천서를 검토하며 신분조회를 한 결과 라파예트는 '그냥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하면서 미국으로 달려 온 '후작님'임이 확인되었고, 이에 ...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4.

다들 이걸 먼저 써달라고 요청하시기에 이렇게 써 올립니다 ^^;라파예트와 그의 동료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 디딘 건 1777년 6월 13일의 일이었다. 8주간의 긴 항해 끝의 상륙이었다. 라파예트 일행이 탄 빅투아르 호의 원 목적지는 챨스턴 항구였으나, 영국 해군 프리깃함 두 척이 항구를 봉쇄중이었기에 급히 회두, 추적을 피하다 일부는 내려 육로...

4500명이 1200명 둘러싸고 때려 이긴게 자랑

1777년 1월 3일 북미 뉴저지주 프린스턴.Battle of Princeton. 정확히 233년 전의 오늘.4500명에 야포 40여문 가진 컨티넨탈 아미가 1200여명에 야포 7문 가진 브리티시 아미를 '무찌른' 사건.자랑스럽댄다※워싱턴 장군은 그림에서 묘사된 것 처럼 선두에서 깃발 흔들지 않았음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지원과 프랑스 대혁명 발발 경위

1776년 3월 1일. 당시 영국에서 스파이질을 하고 있던 피에르 오귀스탱 꺄홍 드 보마르셰는 주군인 루이 16세에게 수천 단어로 이루어진 장문의 에세이를 써 제출한다. "La Paix ou La Guerre"(평화 또는 전쟁) 이란 제목의 이 글의 요점은, "미국은 현재 폭력적이고 다급한 위기에 쳐해있습니다." 와 "설탕 농장들이 위험합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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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왕국 전쟁사 또는 단순히, 영국 내전사

7년전쟁 북미전역

말보로 공작의 일생

로열 네이비 이야기

이베리아 반도전쟁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영국육군 블랙왓치 부대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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